나의 고통을 적어내기
어느 유튜버의 영상 속에서 그녀는 오랜 꿈을 이룬 친구를 만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독백을 한다.
'애매하게 슬픈 삶'
그리고 길거리에 걸린 포스터를 바라보며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말 너무나 너처럼 되고 싶었어."
며칠 전 브런치에 썼던 지난 글들을 보았다. 2015년부터 시작된 글 속에서 서로 구독하며 응원을 주고받았던 작가분이 보였다. 4년이 지난 지금 그분은 책을 출간한 작가가 되었고, 나는 그분의 책을 구입했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책을 펴보지 못했다. 오랫동안 작가분의 브런치 글과 글 속에 등장하는 존재에 대해서 진심으로 응원했지만, 왠지 그 책을 펴보기가 애매하게 슬펐다.
열심히 살았으나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 말하기는 부끄럽고 슬픈 삶. 그 속에서 나는 무수히 작아졌고 작은 만큼 누군가의 삶을 동경하기도 쉬웠다. 그래서인지 잊을만하면 올라오는 애매하고도 슬픈 감정이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한동안 유튜버의 영상 속 말이 공감이 되어 자주 떠올랐다. "나도 정말 당신처럼 되고 싶었어요."라고 속으로 읊어보기도 했다. 나 또한 사랑하지만 영영 볼 수 없게 된 사람을 그리며, 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싶었다. 이렇게 속내를 꺼내고 보니 오랜 갈망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마음을 깨달으니 연재 글을 쓰면서 -나를 재촉해 봐야지 하는- 용기가 났다.
"글쓰기란 자신의 고통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고통에게, 고통과 함께, 고통으로부터 외치는 것이다. 고통을 냉정하게 아는 것."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 대니 샤피로
고통을 털어놓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나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느 작가의 행보가 부러워서 내가 이루지 못한 고통에만 머물렀다면 나는 다시 마무리하지 못한 글을 서랍 속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고통과 대화하는 나의 태도 역시 큰 영향을 미친다. 가령 내가 이 글을 쓰기까지 까칠한 독자의 시선으로 "이런 글은 일기장에 쓰면 되지 않을까? 아무도 흥미로워하지 않을 거야."라고 여기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 글은 발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고통에서 바라본 것은 '내가 솔직하게 끄집어낸 글이 어느 한 명에게라도 가닿길 바라는 진심'이었다. 때로는 나의 고통을 얕잡아보거나 회피하는 것을 멈추고, 다정하고 마음이 관대한 사람이 되어서 나의 고통과 대화하고 격려해 줄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다.
몇 해 전, 유명한 아동 문학가의 글쓰기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 그분은 늘 성에 차지 않는 눈으로 내 글 속에 잘못된 문장 구조를 짚어냈고, 워크숍이 끝난 후 나는 한동안 어떤 글도 쓸 수 없었다. 지금도 내 글을 바라보는 내면의 깐깐한 교정가의 모습은 그분을 빼어 닮았다. 한편, 내 글에 대해 응원해 주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글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앞으로 쓸 글에 대해 믿어준 눈물 나는 다정함을 기억한다. 지금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끝내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도록 알려준 이들 덕분임을 그리고 변덕스럽지만 스스로임을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