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은 서글픔에서 벗어나기
작가이자 친한 언니가 진행하는 <나를 표현하는 종이책 만들기> 워크숍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다양한 질감의 종이를 원하는 만큼 구기고, 자르고, 모양을 내어 작은 종이 책의 책장마다 붙였다. 좋아하는 땅, 바다, 숲을 나타내는 원초적이고 꾸밈없는 색상의 종이를 투박하게 때로는 엉성한 채로 책장마다 붙였다. 그 책의 제목은 '소심한 용기'였다. 책을 완성한 뒤에는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끼리 서로가 만든 책을 돌려보았다. 이렇게도 모양을 낼 수 있구나, 이 짧은 시간에 그림과 글까지 넣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들을 하나하나 눈 여겨보았다. 나중에 간단한 자기 소개와 책을 만들어본 소감을 나누는 대목에서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술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동화책 작가였고, 그림을 그리는 분들도 다수였다. 평범한 직장인이 된 내가 책을 만드는 행위나 나를 소개하는 것까지도 모두 소심한 용기였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언니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얼굴이 붉어졌지만 글쓰기에서 늘 한 발자국 나아가길 바라는 언니의 바람이 느껴져서 창피함보다는 고마움이 컸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워크숍에 같이 참여했던 분이 나의 글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몇 개의 글을 올린 브런치를 알려드리고 돌아섰다. 몇 해 전에 이미 멈추어버린 글 목록을 보고 눈물이 차올랐다. 한동안 그 눈물의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브렌다 유랜드의 [글을 쓰고 싶다면]에서는 글을 쓸 때 진정성이 느껴지려면 '미세한 진실'이 필요하다고 한다. 글이 딱딱하거나 볼품없거나 어떻게 될지에 신경 쓰기보다는 무언가를 살펴보고 본 것을 써 내려가는 것이 섬세하고 진실된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이다.
삶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은 바로 그것이 삶 자체이며 가식적이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 챈다.
[글을 쓰고 싶다면] 미세한 진실 중 151p
글을 쓸 때 솔직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쓰라고 한다. 변덕이 심한 자아를 의무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자아 그대로 그 순간에 자유롭게 흐르듯 쓰라는 것인데,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지난 2달간 글을 쓰면서 때로는 속절없이 쏟아내고, 무언가 그럴듯하고 멋진 글을 쓰고 싶어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솔직하게 겪었던 일들을 사실적으로 적어냈다. 그중에서도 계산적이지 않고 가장 솔직한 고백에 가까운 글에 좋아요를 많이 받았다. 돌아보면 솔직해지기 위해 용기를 발휘했을 때 생생한 진솔함이 전달되는 것 같다.
9월부터 동네 체육센터에서 하는 수영반에 등록했다. 여름 내내 수영을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질 않았는데, 가을 무렵이 돼서야 경쟁률이 치열한 수영 강습에 등록할 수 있었다. 첫 수강 날 나를 포함해 처음 등록한 사람들은 정식 풀장의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풀장에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체크받았다. 킥판을 붙잡고 자유형에 이어 배형을 하려는데 배형 할 때 킥판을 어디에 둬야 하는 지도 어색했다. 강사분은 내게 평형까지 배운 거 맞냐고 유쾌하게 나무랐고, 나는 부끄러워 하며 5년 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부족한 실력을 시인했다. 다시 자세를 잡아주던 강사분이 말했다.
"하다 보면 몸이 다 기억할 거예요. 자! 다시 3바퀴 더!"
내 몸이 기억해 준다는 말이 위로가 됐다. 물을 좋아하지만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다면 앞으로 차근차근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자유형, 배형, 평형, 접영까지...... 아직 멀었다. 하지만 내 몸이 기억하고 있음을 의지하며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글쓰기도 이와 비슷하다. 글쓰기를 사랑해 왔지만 오래도록 멈춰진 나의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쓰다 보면 잘 쓰고 싶은 두려움에 쭈뼛 대기 일쑤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어느새 글을 쓰고자 했던 첫 마음을 기억하며 용기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먼 훗날엔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었던 나를 떠올렸을 때 서글픔보다는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의 소심한 용기 덕분에 나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