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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기소개는 하와이로 시작한다

사실 하와이에 가본 적은 없지만

by 노르키

2월 11일 월요일 오전 11시 반.


"이따 엄마가 데리러 올게."

어린이집 현관문 앞에서 나는 일부러 '이따'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 단어를 알아듣는 연두가 내 뜻을 이해해 주길 바라면서. 어린이집 문이 닫히고도 문틈으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주말에 집에서 신나게 먹고 놀아서 엄마아빠와 계속 같이 있고 싶던 모양이다. 얼마 전, 열흘에 가까웠던 설 연휴에도 양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듬뿍 사랑받았다. 주말엔 우리도 작정하고 쉼 없이 과일과 소고기를 먹였다. 평일엔 아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주말엔 정성을 다 쏟아내고 싶어진다.


우리 집엔 태어난 지 20개월 된 연두가 있다. 나와 남편에게는 연두의 존재가 하늘에 뜬 태양이자 북극성이 되어간다. 나라는 사람도 달라진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나의 성취와 행복이 가장 중요했다. 이제는 자주 피곤해져서 책 1권 다 읽을 기운이 없다. 그리고 내가 먹는 것보다 연두를 잘 먹이고 껴안는 시간이 가장 큰 기쁨이 되어간다. 내가 신경 써서 잘 먹이는 만큼, 아기의 볼에 살이 오르고 몸이 튼실해지기 때문이다. 입에 요거트나 밥풀을 묻히고 나를 보며 웃고 춤추는 아기를 덥석 껴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만으로도 다 괜찮아. 이게 모든 걸 채워주는 보상이야.' 아기 냄새에는 행복 호르몬을 나오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 아기는 자는 것도, 응가하느라 끙끙대며 힘주는 모습도 다 예쁘다.


하지만 이 시간은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놓는다. 말 그대로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금요일 저녁 친구와 외출하기도 어렵고, 기차표나 비행기표를 끊어서 훌쩍 바다를 보러 가는 것도 꿈같은 일이다. 출산 전엔 넓은 줄 알았던 세상이 작은 점 하나로 쪼그라들었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러나 세상이 아기엄마를 바라보는 눈이 어떠하든, 내 몸에 짐 지워놓은 의무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든, 그와는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과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은 어엿한 한 사람이다. 내가 가봐야 할 지구상의 아름다운 거리, 만나봐야 할 친절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는데, 이렇게 아기를 돌보며 나이 먹어도 괜찮은 걸까?


노트북을 들고 글을 쓰러 동네 카페에 왔다. 아기를 맡겨두고 얻은 이 시간을 귀하게 써야 한다.


사람들에게 나를 무엇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직장 이름과 직책만 말하면 자기소개는 5초 안에 간단히 끝났다. 5살에 미술학원에서부터 시작된 자기소개에 관한 고민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38살, 프리랜서 에디터, 주부, 20개월 딸의 엄마입니다."

이렇게 적어보지만 어쩐지 부연설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걸로는 잘난 구석이 부족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런 설명이 온전한가? 내가 맞나? 싶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풍요로운 나의 세계가 있다.

나는 프리랜서 에디터다. 아기를 키우면서도 여러 업체와 열심히 일해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지난해엔 (눈물을 머금고)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6개 업체와 일했다. 라이프스타일과 육아, 비즈니스 기사를 썼고, 웹진을 만들었고, 기업의 유튜브 콘텐츠 제작도 대행했다. 잘하려는 욕심이 또다시 발동해 육퇴 후 새벽에 일한 적도 있다. 염증이 몰려와 수액을 맞기도 했었다. 그래도 늘 정성스럽게, 마감시간 내에 마쳤던 내가 대견하다.

3년째 이어온 '띠동갑 글쓰기 클럽'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물론 회원 넷 모두가 운영자다!) 우리는 코로나 기간에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수다를 떤다.

거의 매일 카톡으로 안부를 나누는 친구의 존재가 나를 든든하게 지켜준다.

나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공부가 재밌다. 매일 신문을 읽는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은 많은 나의 내면의 소망을 마주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젯밤 일기장엔 두서없이 적어놓았다.

언젠간 바다가 보이는 하와이 해변에 집을 살 거야.

OOO가 될 거야. (이루기 전까지는 비밀이다.)

내 글이 내게도 남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남편이 웃으며 계획을 물었다. "하와이? 좋지. 어떻게?"

모르겠다. 세부 계획 따위는. 하와이는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추성훈네 가족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사랑이와 하와이를 누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주말마다 로또를 사야 하나? 사실 하와이에 가본 적도 없어. 그냥 푹 자고 일어나면 창밖으로 넓고 조용한 바다와 야자나무가 보이기를 바랄 뿐이야.


나의 자기소개는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싶다. 나의 풍요로운 세계와 간밤에 꾸는 희한한 꿈, 어딘가에서 작게 들려오는 '하와이이이~ 아사이보오오올~' 같은 목소리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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