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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질감이 재생되는 시간

영화 <너와 나의 5분> 리뷰

by 선이정

DIRECTOR. 엄하늘

CAST. 심현서, 현우석, 공민정, 이동휘 외

SYNOPSIS.

음악을 나눠 듣던 5분, 오직 우리 둘만의 시간 2001년. 새로 전학 온 경환은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기만 하다. 좋아하는 일본 음악을 들으며 외톨이처럼 지내던 경환에게 짝꿍이자 반장인 재민이 관심을 보이고, 둘은 음악 취향이 비슷하단 것을 알게 된다.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던 쉬는 시간, 버스 맨 뒷자리에서 이어폰을 나눠 낀 채 음악을 함께 듣던 하굣길, 둘만 아는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던 어느 날, 재민을 향한 마음이 커진 경환이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데...


POINT.

✔️ 심현서 배우는 화제가 되었던 단편영화 <유월>의 그 초등학생입니다. 빌리 엘리어트였던 소년이 이렇게 컸다니... 처음엔 못 알아봤네요. <돌핀>, <힘을 낼 시간>으로 독립영화 판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현우석 배우의 얼굴도 반갑습니다.

✔️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걸 넉넉히 덮을 만큼 장점이 선명한 영화입니다. 특히 감정의 결, 또 그 시대의 기억이 질감까지 세밀하게 구현된 점이 정말 좋습니다.

✔️ 크게 보면 아련한 첫사랑 영화의 자장에 있기도 합니다. 교복과 풋사랑이 교차하는 감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들 영화.

✔️ 스스로 이해받지 못해 외로워본 경험, 소수 비주류로 분류되어 본 경험이 있다면 공감할 구석이 있는 영화입니다.

✔️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작(이자 장편경쟁 수상작)답게, 음악이 빛나는 영화입니다. 일본 밴드의 두 곡을 모티프로 사용하는 곡이기도 하고...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들도 많아요.

✔️ 개봉은 11월 5일입니다.


t_p.jpeg 티저 포스터


이전에 어떤 책(토베 디틀레우센의 <어린 시절>이었다.)을 읽고 궁금해한 적이 있다. 유년기의 외로움을 흉터처럼 가진 이들은 문학에서 만나게 되는 것일까? 결국 연어가 강을 거스르듯 현실을 거슬러 어떤 문화의 장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이런 문화를 희구하다 보니 자신 안의 상처를 되돌아보고 정리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둘 다겠지만, 아무튼 이런 이들에게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경우, 그것이 멸시와 함께 오는 경우다. 2001년 모두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교실에서 정해진 범위 바깥으로 삐져 나간 차이점을 안고 사는 일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21세기는 2001년부터 시작한다. 2000년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는 이걸 억지로 외워야 했을 만큼 자꾸 헷갈렸다. 지금은 더 이상 '21세기'라는 말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므로 헷갈릴 일도 없지만. 2000년이 워낙 밀레니엄이라고 떠들썩했기 때문에, 아직 우리가 이전 세기의 끝자락에 놓여 있으며, 새로운 세기는 다음 해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 잘 매치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때였다. 시작했다고 모두가 말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시작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던.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도 상용화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 지금에 비하면 한참 음질이 조악한 이어폰이 대다수였지만, 그런 걸로라도 귀를 틀어막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취향의 바다에 풍덩 잠수하지 않으면 도저히 숨 쉴 수 없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 주류라 불릴 감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비주류의 감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요즘에 비해, 그 시절은 그런 이들에게 한층 어렵고 운신의 폭이 좁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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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도 그런 시대를 잘 그려낸다. 비단 취향만의 일은 아니다. "빙신 아니면 다 할 수 있지?" 같은 문장들이 체육 시간에 던져지는 순간. 그냥 몸을 잘 못 쓰는 학생도 자신이나 가까운 주변인에게 장애가 있는 학생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움츠러들기 십상이었다. 하루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는 교실에서 그런 건 알게 모르게 티가 다 났다. 움츠러들고 주눅 드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마음을 물어뜯는 걸로 유희 삼는 마음도 있었다. 가끔은 상처가 수치처럼 취급되고, 또 가끔은 못된 게 훈장이 되기도 하는, 교실은 정말 이상한 논리의 공간이었다. 사회성과 동물성이 반쯤 뒤섞여 펼쳐진달까.


그 시절의 교실의 일원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물건들을 사용했다. 그 안에서 자기다움을 표출하려는 몸부림은 늘 있었다. 자기만의 애칭을 만들어 교과서 겉에 적어 놓는 아이도, 자기만의 시그니처 물건을 갖고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라지려고 애를 쓰는 사람조차 암묵적인 범위 안에 있었다. 즉 그 시절 교실은 무엇이 같아야 하는지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는 공간이었다. 비슷한 취향 안에서 약간의 변주가 있어야 했다.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는지 다를 수 있지만 아무튼 흔히 듣는 노래들을 듣고, 어떤 브랜드나 색깔을 좋아하는지 다를 수 있지만 아무튼 흔히 입는 옷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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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견디기 힘든 세계에서 취향으로 귀를 틀어막는 이들의 특징은, 이 세계에 너무 가까운 것들보다 조금은 먼, 그래서 나를 현실에서 두둥실 띄워주는 것들을 바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영화 속 경환과 재민도 일본 밴드 곡을 들은 것이겠지. 이들이 즐겨 들은 globe라는 가수를 전혀 알지 못했음에도 어떤 마음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극 중 경환에게 이따금 쏟아지던 폭언과 폭력은, 그 문화 자체에 대한 것(영화 속에서 발화되는 예를 빌자면, 일본의 망언으로 인한 반일 감정)이라기보다,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이 자기 세계로 침잠하면서 현실에서 발끝이 두둥실 떠오르는 꼴을 못 보던 이들의 것이었다. 그 서늘한 감각은 이어폰 속 혹은 모니터 속 세계와 대비되고, 소년의 마음속에 떠오르던 부드러운 감정들과 대비된다. 그 대비까지 포함해서, 이 영화는 교실에서 이따금 (혹은 자주 혹은 항상) 외로움을 느끼던 비주류 인간들의 공기를 정말 세밀한 질감으로 구현해 낸다.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사이사이로 집어넣은 유머나 뮤직비디오 같은 연출 톤, 일부 대사와 그것이 어설픈 사투리로 구현되는 장면들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그 시절의 폭력적인 공기와 거기 맞서는 사람의 여린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점에서 그런 단점들이 상쇄되어 그저 좋게 바라보고 싶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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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거리가 반짝이는 장면에서조차 어쩐지 그리운 냄새가 나고, 어쩐지 (내가 교복을 입어보지도 못했던 시대임에도 기억이 조작되어) 그 시절 플레이리스트를 꺼내보게 만든다. 어렵게 구해 손에 넣은 CD의 감각, MP3에 몇 곡 들어가지 않아 취사선택을 신중히 해야 했던 고민의 시간은 분명 손쉽게 슥슥 넘기는 스트리밍의 음악보다 (희소성의 사유로) 더 소중하게 기억된다. 그 나이대여서인지, 그 시대여서인지. 아마 둘 다겠지만.


꼭 비주류 취향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외롭고 괴롭던 마음을 누이던 영화들과 다친 마음 한쪽을 기대던 음악들을 누구라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렇게 한때 마음 기대 향유하던 것들을 꺼내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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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음악은 닫히고, 사랑했던 영화관은 문을 닫고, 자본 논리 속에서 어떤 상가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그 안에서 청소년기가 지나간다. 어른이 되면 운신의 폭이 조금은 넓어질까 궁금해했을, 자신만의 물빛 렌즈로 세상을 보던 소년들의 시간이. 사라진 시간은 그 시절 빛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 모든 시간을 거쳐 어른이 된 아이들은 이제 내리는 눈을 맞으며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내가 경환과 재민 나이였을 때 내 새벽을 지켜줬던 사카모토 마야의 노래와 보아의 겨울 발라드를 꺼내 들었다. (이런 말 하는 내가 너무 오타쿠 같지만 그래도 말 나와서 말인데, 이 영화의 미술이 아주 훌륭한데 옥에 티가 하나 있다. 일본 CD 매장에 붙어 있는 보아의 Everlasting은 2006년에 발매되었다.) 친구와 첫사랑 이야기를 하며 걷던 밤길,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도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 시절을 다 지나 어른이 된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음악을 떠올릴지, 또 어떤 풍경을 그려볼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선곡을 하염없이 들으며 눈 내리는 풍경을 보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이 영화는 명실상부 그 시절을 거쳐 온 어른들, 마음 한 구석에 눈 오는 풍경과 departures를 품고 사는 이들을 위한 영화이기에. 있는 기억 없는 기억을 모두 재생해 주는, 그렇게 너와 나를 우리로 만드는 5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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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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