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와 소수
#1 고등학교, 낮
학교의 풍경 이곳저곳이 눈부시게 빛난다. 텅 빈 운동장, 텅 빈 벤치, 텅 빈 체육관, 텅 빈 교실, 텅 빈 쓰레기장.
기태(소리) : 그 녀석은 나에게 아주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다. 보이는, 보이지 않는 그 녀석.
(타이틀) 보이는, 보이지 않는
검은 연기 나타났다가, 6색 무지개 연기로 사라진다.
#2 기태 집 거실, 아침
막 잠에서 깨서 겨우 옷만 걸친듯한 느낌의 은미(38)가 머리를 고무줄로 대충 묶으며 서둘러 거실로 나온다. 미처 잠그지 못한 치마의 지퍼를 올리고, 블라우스를 치마 안으로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식기건조대를 보니 설거치해 놓은 그릇은 하나 없고, 싱크대 안에만 설거지를 기다리는 그릇들이 한가득이다. 한숨을 크게 쉬며 싱크대 안에서 그릇 두 개를 꺼내 대충 물로 헹궈낸다.
은미 : 후.. 야 남기태!!! 너 어제 설거지하는 날 아니었어???
은미는 대충 헹궈낸 그릇을 탈탈 두 번 털고는 식탁 위에 툭하고 내려놓는다. 싱크대옆 무심하게 놓여있던 시리얼을 들고는 두 그릇에 대충 부어버리고는 냉장고를 열어 몸을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무언가를 찾는다. 손으로 뒤적뒤적거려보지만 찾는 게 보이지 않는 듯하다. 한참을 뒤지더니 이내 찾는 물건이 없는지, 냉장고에 머리를 박고 크게 한숨을 쉰다. 그러곤 고개를 훽 돌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본다. 아니, 째려본다.
은미 : 야!!!!!!! 남기태!!!!!!!!!!!!!!!
은미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쩌렁쩌렁 울린다.
#3 기태의 방, 아침
사람인 지 이불인 지 알 수 없는 덩어리가 침대 위에 뭉쳐져 있다. 방은 옷가지와 먹고 남은 간식 쓰레기들로 너저분하다. 꿈틀. 사람인 듯한 이불이 꿈틀거리며 발과 팔이 빼꼼하고 나오며 기지개를 켜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윽고 벌떡 하고 일어나는 기태(18). 남자다우면서 귀여운 외모의 기태. 팔뚝과 다리는 적당히 섹시한 느낌을 준다. 외모와는 다르게 머리는 까치집을 지어 더 귀여운 느낌을 준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은미의 목소리) : 야!!!!!!! 남기태!!!!!!!!!!!!!!!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눈을 비벼 눈곱을 떼내는 기태. 떨어진 눈곱을 바닥에 그냥 툭 하고 버린다. 저벅저벅. 방을 나가는 기태.
#4 기태 집 복도, 아침
터벅터벅 화장실로 향하는 기태.
#5 기태 집 화장실, 아침
화장실로 들어온 기태는 칫솔에 치약을 묻혀 그대로 나간다.
#6 기태 집 거실, 아침
시리얼에 물을 말아먹고 있는 은미. 뭐가 그리 바쁜지 서서 코를 박고 먹고 있다. 그릇을 들고 있는 채로 신발을 신는 은미. 자연스럽게 기태에게 넘긴다. 자연스럽게 그릇을 받아 드는 기태.
은미 : 너 학교 갔다 와서 설거지하고, 우유 사다놔 진짜. 넌 엄마가 시리얼을 물 말아먹으면 좋겠어? 물에 적신 시리얼엔 김치도 올려먹을 수 없어 아들.
발을 온전히 넣어 신어보려 하지만 잘 들어가지 않는 구두.
은미 : 나 간다. 학교 잘 다녀오고!
뒤돌아서 문을 열려던 순간, 은미가 다시 뒤를 돌아본다. 기태는 멍한 표정으로 은미를 바라보고 있다.
은미 : 아들, 오늘도 사랑하고 내일도 사랑해.
기태 : 응, 나도. (퉁명스럽게)
은미 : 으구, 내가 뭘 바라. 간다!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가는 은미. 문이 쾅하고 닫힌다. 3초간 멍하게 서있는 기태. 이내 다시 칫솔을 잡고 양치를 시작한다. 은미의 그릇은 아까 있던 싱크대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식탁에 있던 빈 그릇 또한 다시 싱크대 자리로 돌아간다. 양치를 하며 텅 빈 식기 건조대를 바라보는 기태. 이내 눈길을 돌려 양치를 하며 2층으로 올라간다.
#6 고등학교 복도, 아침
시끌벅적한 교등학교의 복도. 키도 크고, 잘생기고 훤칠한 기태가 지나가지만, 그 어떤 여학생들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익숙한 듯 학생들 사이를 가로질러 교실을 들어가는 기태.
#7 교실 안, 아침
아직 반정도 차있는 교실에 기태가 들어가 창가 쪽 자신의 책상아래에 가방을 툭하고 놓은 뒤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켜는 기태. 시간은 8시 50분이라 나타내고 있다. 이내 다시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는 기태. 창밖에서 꺅하는 소리에 놀라 창밖을 바라보니, 운동장에 식자재 트럭한대가 들어와 있고, 여학생들은 놀라 트럭 주변에 넘어져 있거나, 놀라서 입을 가리고 토끼눈을 하고 있거나, 트럭을 째려보거나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 남학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듯 트럭의 정면에서 학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그 남학생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기태는 무표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학생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책상에 엎으린다.
(점점 화면이 어두워지고 화면전환)
#8 교실 안, 점심
기태는 같은 자세로 책상에 엎드려 있다. 교실은 점심시간에 들뜬 학생들로 시끌벅적하다. 지잉- 하고 울리는 기태의 핸드폰. 기태는 핸드폰만 살짝 들어 메시지를 확인한다.
'창식 님에게서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자세를 고치고 일어나 핸드폰을 켜는 기태. 카카오톡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한다.
(메시지, 소리) 창식 : 야, 오늘 아침에 사고 날 뻔한 거 봤음?
(메시지, 소리) 기태 : 응, 봤어. 왜?
(메시지, 소리) 창식 : 걔 잘생겼던데 니 스타일 아니야?
기태는 창식의 메시지를 보고는 고개를 돌려 창식을 바라본다. 반대편 책상에 앉아 친구와 함께 기태를 보며 키득거린다. 이내 고개를 다시 돌려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상에 엎드리는 기태.
(소리) 창식 : 창식아, 그래도 넌..
키득거리는 창식, 그와 함께 키득거리는 친구1
(소리) 창식 : 그래도 넌..
엎으려 있는 기태에서 창식이 쪽으로 앵글이 움직이면, 창식이와 함께 즐겁게 웃고 있는 기태의 모습이 보인다.
(소리) 창식 :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잖아.. (나중 회상 장면에서 사용)
다시 앵글은 기태 쪽으로 움직인다. 움직임없이 엎드려 있는 기태. 앵글은 기태를 지나 창문 밖으로 향하며 페이드 아웃.
#9 교실 안, 하교시간
기태는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사고가 날 뻔한 그 아이가 걸어서 학교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태는 무언가 생각난 듯 번뜩하며 책상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볼펜으로 뭐라고 휘갈겨 쓰더니 그 페이지를 찢어 가방을 챙겨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간다.
#10 교문 앞, 하교시간
운동장을 달려오는 기태. 교문 앞에 다다르자 숨을 고르며 앞서 걸어가고 있는 사고가 날 뻔한 남학생을 쳐다본다. 다시 빠른 걸음으로 그 남학생에게 다가간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뒤 남학생의 앞에 서서 가로막는다. 명찰을 바라보는 기태. '안동욱' 얼굴을 바라보는 기태. 아까 찢어 2번 접은 종이 쪼가리를 건넨다.
기태 : 오해는 하지말고, 다른 애들은 다 아는데 넌 오늘 와서 모르잖아.
멍하니 기태를 바라보는 동욱. 기태보다 키가 작아 기태를 올려다본다. 종이가 동욱의 가슴 쪽에 있고, 기태는 종이를 흔들어 가져가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동욱이 아무 말 없이 받아 들자 훽하고 돌아서 가버리는 기태. 영문도 모른 채 종이를 받아 든 동욱은 점점 멀어져 가는 기태와 종이를 번갈아 바라본다.
#11 동욱의 방, 저녁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방으로 들어오는 동욱. 하굣길에 만난 기태가 떠오른다. 쪽지를 주는 장면, 멀어져 가는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수건을 목에 걸고는 교복 주머니를 뒤적거려 쪽지를 꺼낸다. 조심스레 쪽지를 열어본다. 쪽지를 읽는 동욱의 뒷모습.
#12 동욱의 방, 밤
어두운 방 안. 스탠드 하나만 동욱의 방을 밝히고 있다. 동욱은 침대에 누워 기태가 준 종이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이내 다짐한 듯 침대 옆 탁상의 노트를 꺼내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서서히 동욱에게서 멀어지며 화면전환.
#13 기태의 방, 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기태. 기태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페이스북 OO고 알려드립니다. 페이지가 보인다. 피드를 한참 동안 쭉쭉 내리다, 한 게시글에서 멈춘다.
'남기태는 게이다.'
#14 고등학교 복도, 낮 (과거)
여학생 한 명과 기태가 마주 보고 서있다. 수줍게 기태에게 선물과 편지를 내미는 여학생. 하지만 받아 들지 않고 여학생을 바라보는 기태. 여학생에게 뭐라고 말하는 기태. 여학생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부끄러운 듯 뒤돌아 달려간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창식
#15 거리, 낮 (과거)
사복을 입은 기태와 사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다.
기태 : 우리 이거 찍을까?
남자1 : 그럴까?
남자1은 웃으며 기태와 함께 인생네컷 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웃으면서 사진을 가지고 나오는 기태와 남자1. 둘은 사진을 보며 해맑게 웃으며 걸어간다. 기태는 가지고 온 메신저백에 사진을 넣는다.
#16 기태의 방, 밤
'남기태는 게이다'의 게시글에 멈춰 있는 기태의 손. 조금 더 내리자 기태와 남자1의 사진이 나온다. 네 컷의 사진은 서로의 입술에 뽀뽀하는 사진, 서로의 볼에 뽀뽀하는 사진, 손으로 하트를 그리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남자1의 얼굴엔 블러처리가 되어있다. 기태는 멍하니 사진을 보다가 핸드폰을 꺼버린다. 스탠드를 끄는 기태. 화면 암전.
#17 학교복도, 낮
교무실에서 나오는 동욱과 동욱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 동욱의 표정이 좋지 않다. 동욱은 기태를 발견한다. 하지만 동욱과 여자는 기태를 지나쳐간다. 기태는 뒤돌아 동욱을 바라본다. 복도 끝에서 사라지는 동욱과 여자. 기태도 뒤돌아선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기태. 그때 누가 기태의 등을 툭툭하고 친다. 기태가 뒤돌아보자 동욱이 서있다. 어제 기태와 동욱의 표정이 바뀌어져 있다. 동욱은 아무 말 없이 예쁘게 접은 쪽지를 건넨다. 기태는 어제의 동욱과 똑같은 표정으로 동욱의 얼굴과 쪽지를 바라본다. 동욱은 다시 한번 가져가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기태는 쪽지를 조심스레 받는다. 기태는 그대로 뒤돌아서 복도 끝으로 사라진다. 기태는 그런 동욱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동욱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해서 동욱이 간 복도 끝과 쪽지를 번갈아본다.
#18 학교 수돗가, 낮
동욱의 쪽지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펼쳐보진 않는 기태. 머리를 헝크러트리더니 머리를 쥐어뜯는다.
기태 : 악!!!! 후 이게 뭐라고 이렇게 쫄고있어 남기태. 그래, 보자. 어차피 내용은 뻔하잖아.
쪽지를 풀어 펼치는 기태. 편지지 정도 크기의 종이. 생각보다 길게 적힌 종이 위의 글자를 기태는 작은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기태 : 안녕, 남기태. 난 어제 전학 온 안동욱이야. 어제 네가 준 쪽지 봤어. 알려줘서..
동욱이 편지를 적고 있는 밤의 장면.
(소리 오버랩) 동욱 : 알려줘서 고마워. 입모양으로 대충 알아는 들었는데, '다른 애들은 다 아는데 넌 오늘 와서 모르잖아.'라고 한 것 같았어. 맞지? 나도 다른 애들은 다 아는데 넌 모를 것 같아서 말해줄게. 난 청각장애인이야.
동욱이 쪽지를 펼치는 장면. 쪽지에는 '남기태는 게이다'라고 적혀있다.
동욱이 편지를 적고 있는 밤의 장면.
(소리) 동욱 : 후천적인 사고로 청각을 잃었고, 그래서 거의 듣지 못해. 그래서 입모양으로 대충 말을 알아듣기도 하고, 수어를 사용하기도 해. 다 번거로울 땐 그냥 문자로 대화하기도 하고. 암튼 그냥 너도 알고 있으라고.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다시 편지를 읽고 있는 기태의 모습.
기태 : 좋은 하루 보내.. P.S. 안동욱도.. 게이다!?
편지 마지막에 큰 글씨로 적혀 있는 'P.S. 안동욱도 게이다'
기태는 놀란 표정으로 텅 빈 운동장과 편지를 번갈아본다. 기태는 팔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인다. 벌떡 고개를 들더니 '후 -' 하고 숨을 내뱉더니 편지를 천천히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씨익-하고 웃어 보인다.
#19 골목길, 하교시간
저 멀리 걸어가는 동욱이 보인다. 기태는 빠른 걸음으로 동욱을 따라잡아 나란히 선다. 기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동욱에게 건넨다. 동욱은 무덤덤하게 기태를 바라보고는 종이를 받아 든다. 동욱의 반응이 무덤덤하자 기태는 동욱의 앞에 서더니 허리를 숙여 동욱과 눈높이를 맞춘다.
기태 : 내. 핸드폰. 번호야. 집. 도착하면. 연락해.
기태는 동욱이 입모양을 알아볼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한 뒤 홱하고 돌아서 걸어간다. 기태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지만 뒤에서 보이는 기태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동욱은 그 자리에서 서서 멀어져 가는 기태를 바라보며 종이를 펼쳐본다.
'010-XXXX-XXXX'
정말 딱 핸드폰 번호만 적혀있다. 동욱은 종이를 보고 씨익- 웃더니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던 길을 간다.
#20 동욱의 방, 밤
책상에 앉아있는 동욱. 스마트폰엔 이미 남기태라고 저장이 되어있다. 카톡 프로필 사진을 눌러볼까 말까를 고민하는 엄지손가락. 이내 꾹 하고 누르자 기태가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다른 프로필 사진은 없었고, 이내 스마트폰을 끄고 책상에 엎드리는 동욱.
#21 기태의 방, 밤
침대에 엎드려 있는 기태.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있다. 진동이 울리는 기태의 폰. 기태는 놀라 일어나 핸드폰 화면을 켠다.
[광고] 우성할인마트 행사...
기태 : 에이씨..
다시 엎드리는 기태. 그때 다시 한번 진동이 울린다. 기태는 다시 한번 깜짝 놀라 일어나 핸드폰을 켠다.
[엄마] 아들 잠깐 내려와 봐~!
기태 : 휴..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는 기태.
#22 기태의 집 거실, 밤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는 기태.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먹고 있는 은미. 은미는 먹던 숟가락으로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 손짓한다. 기태는 터벅터벅 걸어 내려와 의자에 반쯤 걸터앉는다.
기태 : 왜 나 잘 거야.
은미 : 설거지도 하고 우유도 사놨네. 고마워 아들.
기태 : 그거 때문에 부른 건 아닐 거 아냐.
은미 : 어우 내 새끼 아니랄까 봐 눈치는 빨라가지고.
후루룩 후루룩 시리얼을 들이부어 마시는 은미.
은미 : 어우 쓰읍 난 아무래도 외국 가서 살아야 하나 봐. 시리얼이 너무 맛있어.
괴테는 할 말 있음 빨리해라는 표정으로 은미를 쳐다본다.
은미 :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야. 너 미국 가서 살래?
기태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은미를 쳐다본다.
은미 : 아니, 미국은 그래도 좀 자유롭잖아. 여기보다 낫겠지. 샌프란시스코가 그렇게 좋대~. 어학연수하고, 고등학교 거기서 나오고 대학 다니면 좋잖아.
기태 : 갑자기 무슨 미국이야. 돈도 없으면서.
은미 : 야 엄마 그래도 그 정도 돈은 모아뒀어. 너 결혼하면 줄라고 모아둔 돈 있어. 미리 땡겨쓰면 되지 뭐.
기태 : (손톱을 뜯으며) 엄마도 같이?
은미 : (다 먹은 그릇을 괜히 숟가락으로 뒤적거리며) 난 한국 시리얼이 더 맛있는 거 같아.
기태 : 지금 먹고 있는 시리얼 미국거거든. 됐어 엄마 같이 안 가면 안 가.
은미 : 아 왜,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그.. 그 뭐냐 훨씬 개방적이고, 거긴 게이 컬처도 잘 형성돼있고..
기태는 말끝을 흐리는 은미를 바라본다. 기태의 시야가 흐려진다.
#23 고등학교 교무실, 낮 (과거)
은미는 기태의 담임선생님 맞은편에 앉아있다. 선생님은 스마트폰을 들고 있고, 화면에는 OO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의 '남기태는 게이다' 글자와 사진이 있는 페이지가 보인다. 선생님은 스마트폰을 은미에게 건네준다.
담임 : 어머님, 많이 놀라셨겠지만 이 글과 사진을 전교생이 다 보았습니다.
(침묵)
담임 : 기태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어디에서도 적응을 잘..
은미 : 기태가, 원하지 않으면 전학 안 보냅니다 선생님. 이게 왜요?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담임을 바라본다) 제 아들이 뭘 잘못했나요?
담임 : 어머니.. 그게 아니라..
은미 : 전 또 제 아들이 무슨 큰 사고라도 친 줄 알았네요. 요즘 애들 다들 연애한다는데, 제 아들이 연애 좀 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담임 : 문제는 아니지만, 기태가 학교생활하는 데 있어서 힘들어 할 수도 있습니다..
은미 : 우리 기태는 뭐래요? 힘들다고 하던가요? 기태 의견은 물어보셨어요?
담임 : 아뇨.. 먼저 어머님께..
은미 : 물론. 선생님께서 우려하시는 부분은 잘 알겠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저를 먼저 부르신 거겠죠. 하지만 본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선생님. 여기 학교잖아요. 우리 기태 아주 올바르고 똑 부러진 아이입니다. 기태 의견 먼저 물어봐주세요. 전 기태의 선택을 존중할 겁니다. 그럼 이만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을 나서는 은미. 담임을 등진 상태로 멈춰 선 은미. 담임은 은미의 등을 쳐다보고 있다.
은미 : 한국에서 이 일이 얼마나 예민하고 민감한 문제인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해 주시는 부분도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사랑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 없어야 합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문 쪽을 바라보며 꾸벅하고는 교무실 문을 나서는 은미. 닫힌 문을 바라보는 담임.
#24 고등학교 교실, 낮 (과거)
수업시간. 기태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가 교문을 나서는 모습을 본다. 엄마가 교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는 기태.
#25 기태의 집 거실, 저녁 (과거)
거실 테이블엔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다. 은미는 찌개 간을 보며 이리저리 부엌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때 기태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풀이 많이 죽어 보이는 기태. 식탁 위의 음식과 은미를 번갈아 바라본다. 인기척을 느낀 은미가 뒤돌아본다.
은미 : 아들 왔어? 오늘 솜씨 좀 부려봤으! 빨리 옷 갈아입고 내려와 밥 먹자. 배고파 죽겠어~!
다시 뒤돌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준비하는 은미. 기태는 아무 말 없이 2층 계단을 오른다.
#26 기태의 집 거실, 저녁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