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달리고 있다는 사실
서윤이와 친구들과 잠자리를 잡으러 나갔다. 진한 파란색, 연한 파란색, 그리고 분홍색의 잠자리채를 들고 아이들은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잠자리들은 높고 낮은 하늘에서 멈춘 듯 날다 아이들이 다가가면 잽싸게 방향을 틀어 도망쳤다. 잠자리 잡기에 실패하길 반복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패턴을 알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가만히 서서 잠자리의 비행을 살폈다. 다가가지 않는 한 잠자리는 유유하다. 멀리 떨어져 관망하는 것만으로는 대상의 진실을 파악할 수 없다.
대신 하늘의 구름이 어떻게 드리워져 어디로 흐르는지 살폈다. 잎이 무성해 커다란 동그라미 같은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바라보았다. 바람이 스칠 때면 잎사귀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방향으로 몸을 떨었다. 그런데도 나무 한 그루 전체의 움직임은 물결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듯 보였다.
아이들은 잠자리를 쫓아 계속 달렸다. 한 친구가 연거푸 두 마리를 잡자 다른 친구들도 잡고 싶은 마음이 커져 열심히 잠자리를 따라다녔다. 쉽게 잡히지 않아 실망스러울 텐데 아이들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아이들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내 마음은 이미 잡지 못할 거라는 체념으로 기우는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잠자리를 따라 달리는 상황 자체가 즐거운 듯했다. 그 모습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래잡기 놀이처럼 보였다. 잠자리는 영원히 잡히지 않는 발 빠른 친구. 이번 놀이에서 아이들은 끝까지 술래다. 중요한 건 누가 술래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그저 놀 수 있다는 것, 지금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잡은 잠자리는 어차피 날려줄 것이다. 마지막엔 모두가 빈 채집통을 들고 돌아갈 테고 과정에서 즐거웠던 기분만 남을 것이다. 과정에서 즐거울 수 있다면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잠시 그걸 잊고 딸아이에게 잠자리를 한 마리라도 잡아주고 싶어 안달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결과 없이도 과정만으로 즐겁다는 걸 익히는 게 유년의 일이라는 걸. 결과 없이 과정만으로 즐거워야 하는 게 삶이라는 걸, 우리는 유년에 배웠던 거구나. 너무 오래전에 배워 자주 잊는다.
삶에서 결과란 빈 채집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 남는 건 기분뿐일지 모르겠다. 잘 살았다는 기분, 신나게 원 없이 놀았다는 기분, 후회없이 맘껏 사랑했다는 기분. 즐겁고 다정하고 애틋하고 뭉클했던 기분만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잘 놀았다! 잘 살았다! 잘 사랑했다! 마지막 순간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오늘 하루는 무엇과 어떻게 놀고 사랑하며 살아야할까.
한 시간 동안 잠자리를 쫓아다녔다. 오가는 길엔 매미도 잡았다. 잡았던 매미를 채집통에 넣어두었다 날려주었다. 매미가 기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손에서 놓여나는 순간 하늘로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끝없이 올라가 작은 점이 되었다 이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왔을까. 갇혀 있는 동안의 두려움이었을까, 자유에 대해 간절함이었을까. 자신이 그토록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는 걸 매미는 알고 있었을까.
겪어보지 않으면, 시도해보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다.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는지, 어떤 힘이 있는지, 써보지 않으면 모른다. 시도해본다는 건 살아있는 존재에게만 주어지는 기회. “그다음에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 벌어지든 그 회오리를 뚫고 달려 나가 볼 기회”*다. 시작이라는 기회가 아직 우리 앞에 많다.
잠자리에 비하면 매미 잡기는 식은 죽 먹기다. 울음에서도 힘이 빠진 게 느껴지듯 나무에 붙은 매미 위로 채집망을 덮으면 날아오르지도 못한 채 기다렸다는 듯 잡힌다. 맹렬하던 울음소리가 한풀 꺾인 듯 달아날 기운도 없어 보인다. 여름은 이미 끝났다는 한 작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입추가 벌써 지났고 처서가 코앞이다. 우리는 열렬히 여름의 빛을 흡수했을까. 내 안에 여름이라는 뜨거운 무엇을 잘 품었을까.
*<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정영목 옮김,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