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3일 오늘의 명언 - 유카와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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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곡선을 만들고 인간은 직선을 만든다. - 유카와 히데키


유카와 히데키(일본어: 湯ゆ川かわ 秀ひで樹き, 1907년 1월 23일~1981년 9월 8일)는 일본이론물리학자이다. 교토부 교토시 출신[2]이다. -일본인 최초 노벨 물리학상 수상

원자핵 내부에 있어서 양성자중성자를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매개가 되는 중간자의 존재를 1935년에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1947년, 영국의 물리학자 세실 프랭크 파월우주선 중에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 ‘유카와 이론’이 증명돼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 반핵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막스 플랑크와 함께 공동 선언자로 이름을 올렸고 중간자 이론 외에 비국소장이론, 소영역이론 등의 이론을 계속 발표했다. 이런 모습은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창이었던 도모나가 신이치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고 도모나가와 마찬가지로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목소리가 작고 강의가 상당히 난해했다고 전해진다.

교토 대학·오사카 대학 명예교수, 교토시 명예시민이었다. 1943년에 문화훈장을 받았고 학위는 이학박사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29년에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의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의 조수가 됐다. 1932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활동했다. 1933년,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일본 수학물리학회 연회가 열렸을 때 야기 히데쓰구와 알게 됐는데 당시 오사카 제국대학의 이학부 물리학과(는 시오미 이화학 연구소)의 초대 주임교수로 부임한 야기에게 부탁해서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하게 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작고 강의는 꽤 난해했다고 전해졌다. 이 즈음에 오사카 위장 병원(1950년에 유카와 위장 병원이라고 개칭)의 원장인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유카와 스미(본명은 스미코)와 결혼해 유카와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가 됐다.

오사카 제국대학으로 옮긴 후 전혀 성과가 없던 유카와를 야기는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주의를 준 뒤 “본래라면 도모나가를 오게 했을텐데 너의 형으로부터 의뢰받아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채용했으니까 도모나가에게 지지 않도록 공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질책했다. 우치야마 료유에 의하면 야기는 비수같은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10]

1934년에 중간자 이론 구상을 했고 이듬해 1935년에는 ‘소립자의 상호 작용에 대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중간자(현재의 파이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했다.[11] 알 수 없는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해서 유럽과 미국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양자론 개척자인 닐스 보어는 1937년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자네는 그렇게 새로운 입자를 만들고 싶은 건가?”라고 유카와를 비판했다고 한다.[11] 중일 전쟁 격화에 따른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던 일본인 과학자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진 않았다. 그러나 중간자와 비슷한 무게의 새로운 입자(‘뮤 입자’)가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진다는 ‘우주선’ 안에서 발견됐다고 칼 데이비드 앤더슨이 발표함으로써 유카와의 중간자론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11][주 1]

1938년 중성자의 존재에 대한 예측과 핵력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연구로 오사카 제국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2][13] 이러한 연구 업적은 훗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됐다.

1939년, 유카와는 솔베이 회의에 초청됐다. 회의 자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됐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과 친분을 가졌다.[14] 이러한 업적에 높은 평가를 받아서 1940년에 학사원 은사상을 수상했고 1943년에는 최연소로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6월에는 일본 해군을 중심으로 한 원폭 개발 프로젝트(F연구) 회의에 초청됐으나 개발이 본격화하기 전에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유카와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신문사의 의뢰를 거절했지만 전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군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이러한 배경을 기록한 일기가 2017년 12월 교토 대학 유카와 기념관 자료실에 공개된 바있다.[15]

더 나아가 1947년에 세실 프랭크 파월 등이 실제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서 1949년 11월 3일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16] 아시아인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작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나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에 뒤를 이은 세 번째의 수상자였고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16] 이 뉴스는 패전과 연합국 점령하에서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에게 큰 힘을 주었다.[16][주 2] 또한 2000년에 유카와의 노벨상 관련 문서를 조사한 오카모토 다쿠지는 추천장 대부분이 외국인 추천자로부터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노벨상 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물게 연구 성과와의 관계가 명료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17]

전후에는 비국소장 이론과 소영역 이론 등을 제창했지만 이론적 성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한편 머리 겔만쿼크 이론에 대해서는 “전하가 ⁠1/3⁠이나 ⁠2/3⁠ 같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존재할 리가 없다”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또 한편으로는 반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막스 보른 등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남겼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중에는 아라카쓰 분사쿠가 이끄는 교토 대학 그룹에서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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