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 말하셨어. 그냥 즐겨."
무거운 장마가 하늘을 지난다. 여름이 짙어지고 있다. 풀 냄새가 한층 강해진다. 후덥지근하지만 이 느낌이 결코 나쁘지 않다.
곧 매미가 울기 시작할 것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빗소리가 거세지면 괜스레 불안했다. 2022년 여름, 나의 반지하방은 침수 위기에 처했다. 시간당 140mm의 집중 호우가 내린 그날도 이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서울 대홍수: 신대방 반지하 침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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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작스런 이직을 앞두고 3주간 틈이 날 때마다 곳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계획된 여행들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들을 불안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유를 즐기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그 여유는 불안이 아니라 온전히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를 담보로 미래를 기약하지만, 어쩌면 그 또한 현재를 즐길 용기가 없는 우리의 핑계일지도 모른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내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말의 주인공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승환,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中)
-[오늘의 문장] 여행은 삶의 본질 그 자체
https://youtube.com/shorts/p1FZAN2k-0g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낭비한 시간"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부모님, 친구들 등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던 시간 들이다. 분명 그 외에도 중요한 일상이 많았겠지만 행복회로 안에는 깊게 자리하지 못했다.
인생은 희망이라는 철로와 추억이라는 연료로 가는 기차가 아닌가 싶다. 철로가 없으면 방향을 잃어 달릴 수 없고, 연료가 떨어져도 더 이상 갈 힘을 잃는다.
미래를 위한 철로를 잘 세워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앞으로 달려갈 수 있는 좋은 추억이라는 연료를 채워 넣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 마음이라는 기름통에 추억이라는 연료를 채워 넣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말자.
6월 초 오래간만에 부모님을 뵈러 대구에 다녀왔다. 대구는 내가 태어난 곳이고 아버지께서 청년이시던 시절부터 쭉 살아오신 동네이기도 하다. 8살부터는 대구 옆에 위치한 경산에 살며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나왔다.
경북 경산은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는 한적한 동네다. 꿈을 찾아 서울로 온 지 15년, 이제 난 경산을 시골이라 부르지만 여전히 그곳엔 어릴 적 추억들이 깊이 스며 있다. 고향을 떠올리면 학교 가던 뚝방길(둑길) 옆으로 펼쳐진 연꽃 가득 핀 연못과 느티나무가 떠오른다.
어머니께서 꺼내오신 어릴 적 사진첩에서 고향 친구와 내 모습을 발견했다. 생각이 나 오래간만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조금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요양원에 계시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나이가 드신 걸 보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구나 싶었다. 왠지 모르지만 몇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동성로는 어릴 적 친구들과 자주 놀러 갔던 대구 시내의 가장 큰 번화가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간 동성로는 꽤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후 경기 침체를 맞이했고 그 이후로도 상권은 좀처럼 회복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평일이었지만 점심시간임에도 한 점포 건너 한 점포가 비어있을 정도로 공실률이 높았고 거리도 비교적 한적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교복 차림으로 북적이는 거리를 걸으며 새 옷을 살 생각에 설렜던 그 시절이.
대구를 떠나면서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조금 더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떠나는 내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냥, 즐겨". 그 말씀이 나에겐 이렇게 들렸다. "미래를 이유로 현재를 낭비하지 말라고.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건 오직 지금 밖에 없으니까."
여름 하면 물놀이를 빼놓을 수 없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물에 첨벙하고 빠질 생각을 하면 언제나 설렘과 해방감이 온몸 속으로 차오른다. 사람이 물(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면 '나도 저렇게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드넓은 자연 속 계곡을 가장 선호한다. 그다음이 탁 트인 해변과 광활한 바다의 푸른 매력이다. 그래서인지 인공적으로 만든 워터파크는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일과 관련해 좋은 기회가 생겨 처음으로 용인 에버랜드에 위치한 '캐리비안 베이'에 방문하게 됐다.
소감을 말하자면, 생각보다 재밌었다. 계곡과 바닷가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한 휴양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다양한 놀이기구를 한 번에 즐길 수 있어 흥미와 재미에 초점을 맞출 수 있았다. 그리고 아직 초여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없어서 여유롭게 기구들을 체험할 수 있었던 점도 한몫했다. 장마가 지나고 7~8월 휴가철이 되면 엄청나게 사람이 몰릴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가장 스릴 있었던 기구는 '타워부메랑고', 가장 편안했던 곳은 '유수풀')
한 가지 팁을 꼽자면, 캐리비안 베이의 주요 기구들은 대부분 4인으로 탑승하는 경우가 많기에 4인 이상으로 놀러 가면 더 알차게 즐길 수 있다. '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꼭 데리고 와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워터파크는 국내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삼성그룹(운영사는 삼성물산)이 거대한 자본을 투자해 만든 시설이기에 운영이 가능한 곳이 분명했다. 수많은 물을 공급하고 수질을 관리하며, 곳곳에 배치된 인력까지. 멀티플렉스와 백화점처럼 무더운 여름 한 장소 안에서 물놀이와 먹거리, 휴양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거대한 놀이 시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점이 한편으론 자랑스러웠다.
뜻하지 않은 여유였지만, 또 언제 이런 시간이 주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게 무엇이든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말의 주인공이 '여행'"이라는 문장의 의미가 더욱 깊이 와닿는다. 새로운 추억의 연료를 태워 다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만 같아 감사하다.
당신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든, 지금 그 자리, 여기에서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