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경험 #4
어릴 때의 난 '게으른' 아이였다. 그리고 뭔가를 할 때 '손이 느린' 아이였다. 내 나름의 법칙이 있는 책상과 방을 볼 때마다 엄마는 '정리 좀 하지 않으련'이라 말씀하셨고(이 부분은 다 큰 지금도 그렇다는 게 함정…), 직장에서는 무언가 업무를 맡기면 마감일이 다가와도 좀처럼 보여주는 게 없었기에 '왜 이렇게 손이 느리냐'라는 말을 듣곤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 난 좀 억울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는 게 아니라 내 나름대로 많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거고, 그저 내가 생각하는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 바에야 손을 대지 않거나, 작업을 열심히 하면서도 원하는 수준까지 나오지 않아 보여주지 못하는 거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심리 분석들이 나오니 스스로를 좀 더 이해하게 되고 행동의 방향을 수정하는 게 수월해졌지만 어릴 때는 이런 이해가 없었기에 나 스스로도 속상한 순간도 정말 많았고 내가 정말 문제가 많은 사람인가 싶어 자괴감도 많이 들었었다. 그러면서도 고집도 강했기 때문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쉽게 바꾸지 못했더랬다.
그래도 이런 성향은 내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많이 끼쳤다. 첫 회사에서 내가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인수인계 해주시는 분이 도와주셨지만) 책을 만들 수 있게 되고, 기본 지식 1도 없던 맥킨토시와 편집디자인 작업 환경에 대해 2년 정도 지난 뒤에는 회사 동료 중 누구보다 잘 알고 전체를 관리할 수 있게 되었던 건 내가 하는 모든 작업에 대한 걸 알고 싶어 하고 잘하고 싶어 하는 내 완벽주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첫 회사 다닐 때 맡는 작업마다 아무리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내가 만족할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스스로 회사에서 내내 야근을 할 정도로 끈질기게 붙잡아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를 통해 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정말 잘 알게 되었고, 4년쯤 지난 뒤에는 내게 일을 맡겼던 분들에게 '달궁전님이 얼마나 절 일하기 편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알게 되었어요.'라는 인사도 듣게 되었다. 이건 정말 첫 회사를 다니던 내내 다른 분들이 볼 때 질릴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 한 집념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완벽주의에 대한 마음이 바뀐 건 뉴질랜드에서 한인 신문사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그곳은 매 주말마다 뉴질랜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나 여러 종류의 기사를 모아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이었다. 내가 다닌 첫회사도 그리 여유롭지 않은 마감일을 정해서 일하는 곳이었기에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데 내 경험이 부족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매주 발행해야 하는 신문의 마감이라는 건 내가 그동안 알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더라. (지금 돌이켜보면 그나마 매주였으니 일했지 매일 마감인 작업이었다면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ㅋㅋㅋㅋ)
신문사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기존 경력대로 편집디자인이었다. 기사와 광고들을 편집디자인하는 작업이었는데 매주 마감을 해야 하니 디자인 템플릿에 욕심을 가질 수 없었다. 작은 걸 만들더라도 내 마음에 들게 만든 뒤에야 마감을 하던 나였는데, 근무 장소가 사장님 댁 거실이었고, 인쇄 넘기는 시간은 밤 10-11시를 넘기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인쇄를 넘긴 뒤에 모두 같이 퇴근하는 시스템이어서 무작정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내가 내 일 마무리하는 동안 각자 맡은 부분 끝내고 나면 어찌나 얼른 끝내라는 눈치를 주던지 뒤통수가 따가웠다는 0ㅅ0;;;)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정해진 시간에 맞춰 요소들의 중요도를 선별하고, 그 비중에 따라 힘을 빼고 디자인할 수 있게 되더라. 초반에는 이게 잘 안돼서 어떤 페이지는 빡세게 잘하고, 어떤 부분은 완전 날림으로 작업하게 되고 이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체적으로 고르게 수준을 유지하면서 힘 줄 부분만 힘주고 마감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힘 빼는 부분들이 있다한들 중요한 부분만 잘 만들어 내면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힘을 좀 빼는 게 중요한 부분에 더 집중하기 좋다는 것도 느꼈달까.
이후부터는 마감 일정과 대상 고객, 만드는 목적에 따라 요소별 비중을 조절해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디자이너가 일을 잘한다는 건 결국 결과물의 질을 유지하되 '마감'을 잘 지켜야 하는 게 숙명이니 말이다. 이 숙명을 잘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완벽주의적 성향 중 '쓸데없는' 부분이 뭔지를 깨닫고 계속 힘을 뺄 수 있게 되어야 하더라.
분명 경력 초기의 집요한 완벽주의는 실력의 기본 바탕이 되겠지만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뒤에는 '쓸데없는' 완벽주의는 버릴 수 있게 훈련하자. 이렇게 말하는 나도 여전히 완벽주의에 말릴 때가 있다. 그래도 지금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지난날의 나처럼 '완벽주의'로 고통받는 디자이너들에게 이 글이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