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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Aug 25. 2021

연예인병 걸릴 뻔한 집



시선이 닿을 때마다 심란하다. 외면할 수도 없어서 더 심란하다.



태풍이 지나간 것 같다. 지나가긴 했지, ‘주말’이라는 태풍이. 주방 아일랜드 홈바 위에는 아이 장난감과 책들, 갓 도착한 KF-AD 마스크 박스가 놓여있고, 식탁 아래는 난도질당한 스케치북 종이가 흩뿌려져 있다. 걸을 때마다 전쟁 폐허처럼 반쯤 무너진 종이컵 성의 잔해가 발에 차여, 평상을 가로질러 갈 때는 까치발로 종종 가던가, 아예 발로 종이컵들을 뻥뻥 차면서 걸어야 종이컵도 내 발도 안전하다. 이 카오스 속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질서가 생겨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자기 전에 정리를 했어야 하는데... 청소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애들 있는 집이 다 이렇지 뭐.”



소파에 앉아 전투력을 올리고 있는데 기링이 사람 좋게 웃으며 계단을 내려온다. 기링은 지누션의 션을 똑 닮았다. 그가 웃으면서 말하면 전도받고 있는 느낌이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아니, 아니야. 아이 키운다고 집이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자기야.



그에게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 일명 ‘등잔 밑이 어둡력’. 바로 코 앞에 있는 것도 자기 의지로 안 볼 수 있다. 냉장고 몇 째 칸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그 작은 냉장고 안에서도 반찬통을 못 찾는다. 안 찾는 건가. 아무튼 이 능력이 진화하면 선별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면 사물의 상태 따위로 심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 줄로 요약하면 ‘지시하기 전에는 청소하지 않는다’. 고로 집안을 가득 채운 무질서는 나에게만 마수를 뻗친다.



기링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SNS에는 아이가 있어도 모델하우스처럼 해놓고 사는 집들이 참 많다. 아름다운 공간이 찍힌 프레임 안에서 자극받고, 프레임 밖 세상은 되도록 상상하지 않으려고 했다. 알고리즘이 이끌어 주는 대로 유영하다 보면 세상 모든 집이 정갈하고 감각적이라는 일반화에 이른다. 이것이 선순환이라고 생각했었다.



기윤재의 윤(潤)은 윤택할 윤을 쓴다. 물이 넘칠 정도로 많다는 의미로 해석해서 ‘넉넉하다’라고 뜻을 치환했는데, 한자의 구성 원리로 보면  표면이 젖어 반짝반짝 윤기가 난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집 이름 따라 가는지 입주하고 1년 반 동안 윤이 나도록 바지런히 치우고 닦고, 집 안 곳곳을 실눈을 뜨고 평가했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일주일 전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집이 방송을 몇 번 타면서 그 집은 청소를 어떻게 하냐고, 힘들겠다는 말을 유독 많이 들었다. 피곤한 게 사실인데, 예뻐 보이고 싶은 욕심과 그 마음을 낮잡아보는 가식이라는 모순된 쌍 부스터가 입을 조종한다.



“그냥 물티슈로 아이 콧물 닦아주면 뒤집어서 근처에 창틀 한 번 닦아주고 해요.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속마음은, ‘닦고 난 티슈에 붙은 먼지 보고 놀라서 사방에 창틀, 젠다이 싹 다 닦아야 마음이 편하다고요!’



아무리 친한 친구가 온다고 해도,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방송  집의 위엄을 깎아내릴 흐트러짐용납되지 않았다. 친구가 가고 나면 긴장을  탓인지 어깨에 승모근이 딱딱하게 굳어서 목에 마사지기를 걸고 자야 하는  꼬락서니에 어이가 없었다.



사람도 아닌 집이, 맨 얼굴로 외출도 못하는 연예인병에 걸린 것 같았다. 걸려 보이게 내가 만들었다. 너라도 잘 키워야지 하며 열등감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부모 꼴이랑 뭐가 다른지. 이제는 대스타가 되거나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극과 극의 결과만 남았다는 생각이 너울처럼 덮쳐왔다. 그물침대 난간을 닦다가 기운이 빠져 걸레를 쥔 채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천창 너머 보이는 파란 창공이 오늘따라 더 파래 보인다. 입주할 때 ‘이제 정리 잘하고 살자’는 누구나 하는 흔한 다짐이었는데, 남들 집 보면서 나도 이렇게 보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었을 뿐인데, 이렇게 누워서 하늘을 바라 볼 여유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 그물침대를 닦기는 닦되 쓰지도 않을 요량이면 누구를 위한 청소란 말인가?! 남의 집 사진에서 시작한 선순환인 줄 알았더니 지독한 악순환이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_법정 스님 <무소유>



주객이 전도되어 내가 가짐을 당하게 된 것. 나는 지금 ‘집사’라는 직책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집에 종속된 거다. 일상의 주인이 난초가 될 만큼 법정 스님이 난초에 가졌던 집념처럼, 지금 내 모습이 집에 대한 지독한 집착의 발로라면, 난초를 친구의 품에 선뜻 안겨준 스님처럼 되기 전에 내가 가진 것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빠… 정말 아이 키우는 집이 조금 이래도 될까..?”



이럴 때 기링이 곁에 있어 참 고맙다. 까짓 거 전도당해볼까 하는 틈을 보이자 기링이 맞장구도 아닌 맞꽹과리를 치며 내 말을 긍정한다.



“그럼~사람 사는 게 뭐야. 다 이렇게 살지~!”



그래, 앞 산 뒷 산 푸르름에 감탄할 시간, 빗소리에 맞춰 손가락 장단이라도 칠 시간쯤은 지켜내자.  



“어차피 코로나 거리두기 때문에 누구 부르기도 그렇잖아. 좀 놓고 살아도 되. 조금 나아지면 그때 한번씩 손님 초대하자. 그 김에 청소도 찐하게 하고. 내가 2층 맡을게.”



빛이 있어야 어둠이 생기는 것처럼 질서가 있으면 무질서가 존재한다. 책, 장난감, 마스크 박스, 종이컵.. 모두 질서와 무질서를 끊임없이 오가는, 어차피 무상한 것들. 기링의 한 마디에 쉽사리 변하지 않겠지만 끊임없이 알아차릴 테다. 흐트러짐에서 오는 불안 또한 무상하니 다시 주방 아일랜드 홈바 위에 물건이 하나씩 올려지거든 전투력을 끌어올릴 게 아니라, 함께 할 가족들과의 즐거운 정리 시간을 그리리라. 모델하우스가 아닌 사람 사는 집을 적당히, 민낯으로, 비정상적이지 않을 만큼 가꾸고 함께 살아가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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