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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Oct 22. 2021

나라와도 인연이 있다면

프롤로그


  어쩌면 나라와도 인연이란 게 있지 않을까. 우리 부부에겐 영국이란 나라가 그렇다. 2006년 가을, 남자 친구(이자 지금은 남편)가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며칠이 지나도 잘 도착했다는 연락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는데 회식 중간에 낯선 번호로 연락이 와서 받아보니 그였다. 핸드폰 개통은커녕 공중전화에서 국제전화를 어떻게 거는지 몰라 그간 연락을 못 했다고, 목이 메어 조금은 울먹거리던 목소리가 기억난다. 비싼 국제전화 대신 한국과 영국을 오가는 엽서가 작은 상자 한가득 쌓일 때쯤, 남자 친구 부모님이 연락을 주셨다. 비행기 값을 대줄 테니 한번 다녀오라고. 당신들이 가보고 싶지만 내가 가는 걸 그가 더 좋아할 거라고.      


   다음 해 1월, 12시간을 날아 영국으로 갔고, 런던과 파리를 10일간 여행했다. 멀리서 보고파만 하다 짧은 시간 함께 한 여행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1분 1초가 어찌나 소중했는지. 순간을 영원으로 붙잡고 싶었던 젊은 날이 거리 곳곳에 소복이 쌓였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마지막 날,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시작된 눈물은 공항에 도착해서도 그칠 줄을 몰랐다. 앞으로 또 얼마나 그리워해야지 만날 수 있을까. 끝까지 꾹 참고 어른스럽게 나를 위로하던 그는 내가 게이트에 들어가기 직전에야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 일그러진 얼굴이 아직 생생하다.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아릿해지는, 내게는 청춘의 애틋한 추억이 있는 나라가 영국이다.      


  2018년 12월, 갑작스러운 남편의 해외 주재원 발령으로 영국으로 건너와 살게 되었다. 어학연수 당시 같이 살던 중국인 룸메이트가 이스트 런던 허름한 아파트 단지 창 너머 빌딩 숲을 가리키며 “저기가 카나리 워프라고 금융계 중심지야.”라고 알려줬단다. “12년이 지나 거기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지.”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그와 함께 걸었던 피카딜리 서커스를, 트라팔가 광장을, 테이트 모던을, 늘 꿈결처럼 그리워했던 장소들을, 이제는 남친에서 남편이 된 그와 두 아이까지 넷이 되어 걷게 되다니.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영국에서 사는 거 어때?”      


  가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물으면 “좋아. 잘 지내고 있어.”라고 얼버무렸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짧은 카톡 안부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에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할 때 옆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그러다 학교에서 예상치 못한 큰 상을 받아온 날 얼마나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는지, 다정한 이웃들의 환대에 어떻게 마음이 열렸는지,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다른 친구들과 어떻게 곡진한 마음을 나누게 되었는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었지만 매번 잘되지는 않았다. 9시간이라는 시차의 벽은 생각보다 컸고, 생활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그러다 겨울 우울증과 코로나 우울증이 함께 온 2020년의 가을과 겨울, 내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는 ‘우두커니’였다. 세상이 멈춘 듯 새로울 것이 없는 하루, 점점 짧아지는 낮과 긴긴밤,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 가족 외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시절, 나는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전달되지 못하고 속으로 가라앉은 말들이 내 몸 곳곳을 빙빙 돌다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같던 겨울이 지나고 봄기운이 아른거리는 2021년 3월,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2주에 한 번씩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곧 글쓰기는 그 해 한 일 중에 가장 마음을 쏟은 일, 고통과 보람을 함께 안겨준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타국에 사니 내 나라에 살 때보다 감정의 진폭이 더 컸다. 기쁜 건 더 기쁘고, 속상한 건 두 배로 더 속상했다. 외로울 땐 바닥까지 더 내려가지만, 그때 받은 위로는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런 순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어서, 작은 디테일까지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희미해지기 전에 글로 꼭꼭 박아두었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외로웠던 나를 위로하고자 시작한 글쓰기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이들의 눈부신 유년과 아직은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내고 있는 당신과 나, 우리의 ‘시절일기’ 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서 조금은 더 단단해진 나를 만난다. 이 기록들이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기를. 바라건대 당신의 마음에도 가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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