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변화의 키워드, 돈오점수(頓悟漸修)

by 안철준

안녕하세요, 촌장입니다.


우리는 종종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을 꿈꾸곤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치는 깨달음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거나, 책 한 권을 읽고 사람이 180도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도 하죠.

하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헬스장 등록을 결심했던(깨달음) 1월 1일의 열정은 2월이 되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이제부터 긍정적으로 살겠다"는 다짐은 사소한 말다툼 한 번에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서, "그래, 이제 SNS는 다 끊어버리고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거야" 라고 결심을 해도, 금새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쇼츠를 스크롤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체 왜 우리의 깨달음은 삶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걸까요?

800년 전, 고려의 승려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이 물음에 대해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 제가 좋아하는 문구이기도 하죠.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유래

고려 중기, 불교계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경전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교종과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대립했고, 승려들은 권력과 결탁해 타락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지눌은 한번에 깨닫고(돈오頓悟), 점진적으로 닦는다(점수漸修)는 수행론을 주창하며 불교계를 정화했습니다.

지눌은 우리의 마음을 '얼음과 물'에 비유했습니다.

얼음의 본질이 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돈오(頓悟)입니다. "아, 내가 본래 부처구나!",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니라 찰나의 통찰입니다.

하지만 본질을 알았다고 해서 꽁꽁 언 얼음이 당장 흐르는 물이 되어 갈증을 씻어줄 수는 없습니다.

얼음이 실제로 물이 되기 위해서는 따뜻한 볕을 쬐며 녹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점수(漸修)입니다.

우리 안에 오랫동안 쌓여온 나쁜 습관, 즉 습기(習氣)를 닦아내고 깨달음을 현실로 구현해 나가는 끈질긴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_upload_1764687580.png?u=1764687582




현대인의 자기계발: '유레카'와 '루틴' 사이

이 오래된 수행론은 오늘날 자기계발의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맥이 닿아 있습니다.

현대인의 '돈오(頓悟)'는 '각성'의 순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 살 수는 없다"는 자각, 자신의 꿈을 발견한 순간, 혹은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한 순간이 바로 현대판 돈오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엄청난 고양감과 함께 미래가 바뀔 것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짜릿한 감격이 몰려오고, 자존감은 한껏 고양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돈오' 각성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깨달음의 짜릿함에 취해, 그것이 곧 성취라고 착각합니다. 어제까지 게으르던 사람이 오늘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내일 당장 부지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뇌와 신체에는 수십 년간 축적된 '관성'이라는 두꺼운 얼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현대인의 '점수(漸修)', 바로 '습관 형성'과 '꾸준한 실천'입니다.

800년 전 지눌의 '점수'는 현대판 '루틴'에 다름 아닙니다.

돈오가 '방향'을 잡는 나침반이라면, 점수는 그 길을 걸어가는 '두 발'이죠.

돈오가 자기계발서의 '첫 장'이라면, 점수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연습 문제'입니다.

다이어트를 예로 들어볼까요?

"건강을 위해 살을 빼야겠다"는 자각(돈오)은 누구나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몸을 바꾸는 것은 매일 아침 운동화를 신는 귀찮음을 이겨내는 점수의 과정입니다.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돈오)은 쉽지만, 매일 단어장을 펴는 행위(점수)는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사례는 수 백개라도 들 수 있죠.

지눌은 깨달음 이후에도 수행을 멈추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현대적 언어로 바꾸자면, "동기부여는 시작을 돕지만, 습관만이 당신을 계속하게 만든다"는 짐 론(Jim Rohn)의 명언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종종 깨달음의 부족이 아니라, 지루한 훈습(薰習)을 견디지 못해 실패하곤 합니다.

_upload_1764687616.png?u=1764687618




점수(漸修), 가장 숭고한 지루함

돈오점수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위로는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결심하고 내일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거짓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얼음을 녹일 열기가 충분히 쌓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습관(점수)은 한순간의 폭발적인 힘이 아니라, 빗방울이 바위를 뚫듯 꾸준한 반복을 통해 완성됩니다.

당신이 오늘 느낀 성장의 필요성이 '돈오'라면, 내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그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점수'입니다.

화려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때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 반복들이야말로 당신의 깨달음을 진짜 '당신'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지루함이 바로 진정한 변화의 정수입니다.

_upload_1764687674.png?u=1764687675




오늘도 돈오점수(頓悟漸修) 하시길 ~

촌장 드림

keyword
작가의 이전글AI 거품론이 아닌 5가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