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읍내 - 중앙호수공원, 동부전통시장, 서산향교
서산의 가을을 만나러 왔지만, 계절은 아직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 햇빛은 여전히 여름의 기운을 품고 있었고, 바람은 낮게 불며 변화를 망설였다. 중앙호수공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낡아가는 연꽃을 보았다. 한때 수면 위에서 찬란히 피어나던 꽃잎들은 색을 잃고, 빛바랜 종이처럼 주름지고 있었다. 그 연꽃들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수는 고요했다. 물 위엔 낙엽 하나 없이 맑았고, 그 맑음 속에 하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 하늘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가을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시간으로는 이미 가을이어야 할 때였다. 하지만 서산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햇살은 여름의 잔열처럼 몸에 붙었다. 계절이 늦는다는 것은 단순히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가 잠시 멈춘 듯한 감각, 변화의 예감만 남은 시간의 틈이었다.
중앙호수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여름의 흔적과 가을의 예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아직 완전히 시들지 않은 연잎과,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갈대의 흰빛. 살아 있음과 사라짐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그 불완전한 균형이 어쩐지 사람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시절을 떠나지 못한 채,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머뭇거린다.
나는 호수를 떠나 동부전통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입구에는 붉은 현수막이 펄럭이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얽혀 있었다.
활어 수조 속에서 대하가 꿈틀거렸다. 가을이면 서산의 시장은 늘 대하로 들썩인다. 하지만 나는 그 대하를 보며 묘한 감정에 잠겼다. 제철이라는 말은 언제나 생의 정점처럼 들리지만, 생명에게는 그 정점이 곧 끝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장의 상인은 “지금이 최고 좋을때.”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이 어쩐지 잔인하게 들렸다. 인간의 달력에서 ‘제철’이라 불리는 순간이, 그 생명에겐 가장 위험한 시간이라는 사실. 제철이라는 단어 안에는 풍요와 소멸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그건 연꽃의 시듦과도 닮아 있었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지나고, 남은 껍질이 바람에 흔들릴 때, 그것이야말로 진짜 생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오후가 기울 무렵, 나는 서산향교로 향했다. 오래된 돌계단을 오르니 넓은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가지가 넓게 퍼져 있었지만, 그 잎들은 아직 초록이었다. 가을의 문턱에서, 나무는 여전히 여름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 나무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계절이 머뭇거린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순간을 오래 붙잡아 두려는 몸의 기억. 은행나무는 자신이 물들어야 할 때를 알고 있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바람이 불었다. 잎 하나가 떨어질 듯 말 듯 흔들리다, 결국 떨어지지 않았다. 그 머뭇거림이 아름다웠다. 완성되지 않은 풍경은 늘 여지를 남긴다. 그 여백이야말로 인간이 시간을 느끼는 방식 아닐까. 서산향교의 마당은 조용했고,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햇살이 기울며 금빛으로 번졌다. 나는 그 빛이, 아직 오지 않은 가을의 약속처럼 느껴졌다.
해가 넘어갈 무렵, 서산의 공기는 조금씩 식어갔다. 나는 하루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계절이 늦는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때로는 그 늦음 속에서 세계는 더 많은 시간을 얻는다. 낡아가는 연꽃이 아름답고, 아직 물들지 않은 나무가 깊이 있는 것처럼. 완성되지 않은 시간은, 여전히 살아 있는 시간이다.
서산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연꽃은 시들어가며 자신을 비웠고, 대하는 제철을 맞으며 스스로를 내주었고, 은행나무는 변화를 미루며 계절을 견뎠다. 그 셋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서산의 가을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부재는 곧 존재의 다른 이름이었다.
기다림 속에 계절은 만들어지고, 그 기다림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그 깨달음을 가슴에 담고 천천히 걸었다. 호수의 물빛이 어둑해지고, 시장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향교의 그림자가 밤에 스며들었다. 서산의 땅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가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 부재 속에서 나는 분명히 가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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