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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긁복의 모두극뽁 Nov 09. 2024

아동학 박사의 난임중(中)일기(1)

난임의 아픔을 딛고 떠나는 30대 중반 유부녀의 홀로서기 여행기 

스무살 때 아동학을 전공한 이후로, 서른 다섯까지 15년 넘게 아이들에 대해 공부하고 발달을 연구하는 삶을 살았다.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에는 어린이집에서 교사로 일하며 주경야독했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에는 어린이집 원장으로 아이들과 매일의 일상을 함께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모두들 말했다. 남의 아이를 그렇게 예뻐하는데 본인 자식은 얼마나 예뻐하겠냐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 당연했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지만 주제 넘게도 나는 내 아이를 누구보다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공부할 때는 공부하느라, 일할 때는 경력이 단절될까봐, 결혼은 서른이 되기 전에 했지만 임신과 출산은 미뤄왔었다. 그러다 "이제는 가져도 되겠다."했을 땐 아무리 노력해도 아기는 와주지 않았다. 


우리 연구실은 공부하는 학문이 아동학이다 보니, 유난히 다복한 연구실이었다. 우리나라 평균 출생률과는 달리, 우리 연구실의 평균 출생률(비공식)은 1.5는 된다고 할 정도로 모두들 적기에 결혼하고 곧이어 임신과 출산 소식을 전했다. 우스갯소리로 "삐아제(Piaget, 발달심리학자)도 자기 아이들 데리고 연구했는데 우리 과는 출산이 커리어지."라는 말도 심심찮게 했다. 자발적 비혼과 DINK가 대세인 시기에, 임신과 출산이 커리어가 되는 전공이 어디 흔하겠는가. 


그러니 마음은 더욱 조급했다.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어린이집에서 원장으로 학부모 상담을 할 때나 가정통신문을 쓸 때 부모님들이 "너는 아이 안 키워봐서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지. 한 번 낳아서 길러봐라." 라고 생각할까봐 괜히 작아졌다. 친구가 아이를 훈육할 때 어떻게 해야되냐고 물으면 "이제는 말귀 알아들을 때니까 단호하게 안된다고 해야 돼."라고 조언하면서도 내 말에 힘이 실릴까 걱정됐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동기에게 특강을 부탁했을 때, 그 친구는 자기 딸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면서 설명하니 학생들의 몰입도가 달라보였다. 결혼 후 5년이 넘도록 단 한번도 임신이나 출산계획에 대해 우리 부부에게 묻지 않으셨던 시아버님이 어느 날 식당에서 옆에 앉은 아기를 보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떼지 못하시는 걸 봤다. 


실제로 그들의 속마음이 내가 추측한 것처럼 그랬건 안 그랬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 마음에 자격지심이 번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몇 번의 배란유도, 인공수정, 시험관까지. 수도 없는 실패를 경험하고 나니 마음엔 무력감이 가득 찼고, 몸에는 수많은 피멍과 호르몬제로 인한 붓기가 남았다. 남편 말고는 누구도 나의 이런 상황을 몰랐다. 슬프고 아픈데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회사에서도 에너지가 없어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무력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것도 하기 싫은 지경에 이르렀다. 


견딜 수 없었다. 그동안의 내 삶은 내가 뜻하는 대로 노력만 하면 이뤄내는 삶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또 열심히 연구해서 학위를 따고, 고단한 일이었지만 아이들과 하루하루 열심히 보내다보니 어린이집 원장을 하게 되었다. 남들이 적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하지만 아이를 갖는 일은 노력이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았다.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특별한 원인을 모르는 난임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하는지도 몰랐다. 호르몬 불균형이 내게 있었는데 난임 과정에서 고농도 호르몬을 억지로 주입하다보니 그 불균형은 더 심해졌다. 살이 더 찌고, 머리카락은 점점 더 빠졌다.


그런 부서져가는 마음과 비관적인 태도로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게 남편이 먼저 퇴사를 권했다. 그 즈음 읽게 된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 즈음의 내 마음은 산산조각 나서 대부분 폐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폐허를 뒤져서 생존 마음을 찾아내는 것이 내 일이었다. 살아있는 그 마음 조각을 앞세워 겨우 출근을 하고 있노라면, 깊은 곳에서는 항의하는 마음들이 거세게 일어났다. 마음들이 이 꼴인데 왜 출근을 하냐고. 지금은 멀쩡한 애들도 저녁이면 전부 또 폐허로 변할 텐데 출근이 무슨 의미냐고. 나의 강인한 책임감이 앞장서서 매일의 출근을 해내고는 있었지만, 책임감도 점점 기력을 다해가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시점이 가까워졌다는 걸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늘 마음속에 품고 다니던 퇴사 카드가 구체적으로 손끝에 만져졌다(김민철, 무정형의 삶).

내게도 만져졌다. 마음 속에 품고 다니던 퇴사 카드. 남편이 내게도 그 카드가 있었음을 일꺠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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