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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이 바뀌는 시대

서울 자가 김 부장이 바꾼 건, 직업만이 아니다.

by 조은돌

AI시대가 도래했다. 가볍게 사주나 관상, 신변잡기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부터 API를 연결해서 업무를 자동화하는 사람까지, 너도 나도 AI에 열광한다. 모든 인류에게 갑자기 등장한 신기한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인터넷이 등장할 때도 그랬다. 플로피 디스크를 넣어서 아래아한글로 문서 작성이나 하고 블록 깨기 게임정도 하는 컴퓨터가 서로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신기했다.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갖가지 공짜 앱으로 걸어 다니면서도 온갖 정보를 탐색하고 일을 처리하는 신기한 세상을 맞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런 변화가 없진 않았다.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과 철도, 대량생산의 방직기와 거대기업의 탄생. 대기업들이 탄생하면서 이전 농업 중심의 세계관은 막을 내렸다.


이런 시대적인 전환이 이뤄질 때는 기술만이 변하는 게, 아니다. 인류의 손에 주어진 기술은 자본을 끌어들이고 더 나은 경쟁력으로 새롭게 경제의 랜드스케이프를 일차적으로 바꿔 버리지만 곧 그 파도는 정치, 사회, 문화 전 영역으로 퍼져 나간다.


경제 구조와 형태, 계급의 질서, 권위의 향배와 부의 획득과 배분방식도 바꿔 버린다. 결국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도 바꿔 나간다.




이제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유교사회의 덕목이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구가 벌써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는 게, 그 방증이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성장 신화도 그 막을 내리고 있다. 야근과 주말 근무, 종신고용제, 갑질 문화, 상명하복의 질서 체계가 붕괴하고 있다.


자유복장, 유연근무제, 성과에 기반한 인센티브제, 이직과 전직의 유연성, 회사보다 개인의 전문성을 중시하는 문화도 서서히 퇴조하고 있다. 이미.


이젠 어떤 문화가 등장할까? 어떤 세대가 등장할까? 인공지능과 로봇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는 가까운 미래에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일까?


인류는 스스로의 존재의 이유를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조상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유교적 명분이나 근면 성실로 부를 쌓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명제도 사실은 인류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존재의 이유이자 삶이라는 게임의 룰이었다.




인류에게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다면? 욕망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모든 인류가 부처님처럼 깨달아서 해탈하였다고 하자. 더 이상 아등바등 살 이유도 없고 삶이 고해이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허상이요, 허욕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자.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냥 두면 당연히 인류는 멸종할 것이다.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 반드시 뭔가 그럴듯한 목표와 목적이라는 게임의 룰을 다시 세팅할 것이다. 해탈의 경지를 털고 나와서 진지하고 진심으로 세속적인 그 무엇을 추구하도록 세뇌하고 설득할 것이다.


김 부장에서 드라마는 그가 25년 동안 그토록 몸부림치며 갈구한 임원승진이 결국 부와 명예, 가족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포장되었지만 내면엔 주변으로부터의 인정을 받고자한 몸부림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자신의 에고, 자존심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것. 결국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진짜 삶이 보인다고. 미래를 위해 아등바등 살지 말고 소박한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라고 매듭짓는다.




AI와 로봇의 등장으로 우리 모두는 조만간 강제로 김 부장처럼 뭔가를 내려놓아야 하는 시기에 도달할 것이다. 내가 가진 전문성과 나의 노동력이 수만 장의 GPU에서 토해내는 전문성보다 높지 않다는 걸, 시인하게 될 때 우리의 에고와 자존심은 여지없이 박살 날 것이다.


절망한 인류에게 필요한 건, 이젠 뭘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새로운 게임의 룰이다. 이젠 뭘 추구하고 살아야 하나?


인류에게 만약 어떤 목표, 어떤 명분, 어떤 가치와 룰이 주어지지 않고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인류는 행복할까? 인류는 아마도 원시시대의 무정부시대, 폭력이 난무하는 정글로 곧장 회귀할 것이다.


그래서 인류에겐 목표와 어젠다, 옳다고 믿는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맞든, 옳든 상관없이 그런 게 있어야 인류 자체가 유지가 된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문명을 관통하는 건, 그 당대의 주류 철학 즉 그 당시에 설정한 삶의 존재이유에 대한 집단의 과몰입이었다. 그 체제가 무엇이었든 모든 구성원들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가차 없이 죽이거나 추방하였다.


그래서 AI시대, 초지능이 탄생하고 난 다음 인류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게임의 룰은 무엇이 될까?


인류는 아마도 지력 경쟁을 끝낼 것이다. 내가 더 똑똑하고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경쟁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어차피 우리 개개인의 지식과 정보로는 AI를 당할 수 없을 테니까. SKY와 같은 학벌체계가 무너질 것이고 사회계급의 역할에 대한 소득 배분도 달라질 것이다. 의사, 변호사, 교수, 학자와 같은 아는 것이 많다는 이유로 고소득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당할 가능성이 높다. 공장 노동자들도 더 이상 대규모로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고 노조도 힘을 잃을 것이다.


사회복지나 로봇세 또는 기본소득으로 사람들은 먹고살 수는 있겠지만 뭘 해야 할지, 어떤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헤맬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엄청난 권태와 게으름, 혼돈과 혼란이 도래할 것이다.




목표가 사라지고 살아야 할 이유가 뚜렷하게 없는 사회.


일부에선 대량으로 자살하거나, 마약이나 도박과 같은 쾌락에 탐닉하거나 중독될지도 모른다. 사이비종교가 횡행하고 팬덤을 바탕으로 한 정치인, 연예인, 인플루언서에 과몰입해서 그걸로 삶의 목표를 삼으려 들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인류는 마지막 지혜를 발휘해서 뭔가 목표를 찾아낼 것이다. AI시대에 걸맞은 인류 공통의 어젠다를.


그게 영성이나 구원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개인적 몰입이나 예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도 여전히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 박경리를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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