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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an 17. 2017

이별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

끝 뒤에 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그 당시, 나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았다. 몇 년 만의 연락이었다. 잘 지내냐는 간단한 안부 인사로 시작된 짧은 문자 메시지. 그 간략한 메시지를 천천히 읽으며 나는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에 그 사람 이름이 뜨자마자 숨통이 틀어막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놀랐던 것이다. 놀란 채로 약간의 두려움도 느꼈던 것이다.

   그래,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끝나 버린 관계였다. 그 사람과 나는. 그래서 그 사람 이름을 보자마자, 그 사람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 왔단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다시 서로에게 상처 주게 될까 봐 무섭고 막막한 심정이었다.

   다행히 그런 내 추측은 빗나가 버렸다. 내 손 안에 든 핸드폰엔 꽤 따뜻한 내용의 메시지가 전송돼 있었다. 하루의 행운이라 느껴질 만큼 다정한 온도의 말들이 내게로 왔다.

   나는 답장을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근데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건넬 말이 궁했다. 





   관계가 진행 중일 때 나는 꽤 수다스러운 사람이다. 질문도 많고, 대답도 길고, 추임새나 감탄사도 풍부하고, 실없는 소리도 잦다. 함께 경험하는 모든 순간들에 대한 감상을 상대와 나누고 싶어 하고, 최대한 그렇게 하려는 편이다. 하지만 관계가 종료된 이후에 나는 한없이 과묵해진다. 사무적일 정도로. 

   물론 일부러 그렇게 구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나는 내가 멀어진 관계의 사람에게도 적당한 분량의 말을 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형식적인 태도와 기계적인 반응은 내 쪽에서도 편치 못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런 건 내 의지로 어떻게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가 아닌 사람을 앞에 두면 머릿속이 저절로 텅 비어 버리고, 그 상태가 집요하게 지속될 뿐이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속으로 된통 애를 쓰지만, 그 노력이 그럴듯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일은 없다(유감스럽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사람이다). 내 입술은 쉽게 떨어지는 법이 없고, 내 눈동자만 이쪽저쪽으로 바삐 굴러다닌다.    





   어느 결에 꺼져 버린 핸드폰 액정을 다시 켰다. 나는 갑작스럽게 바닥나 버린 내 말주변을 느끼며, 우리 관계가 제법 완전히 매듭지어졌단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이제는 진짜 할 말이 없구나. 돌릴 말도, 감출 말도, 아낄 말도 없구나.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답장은 답장이다. 나는 상투적인 말들이나마 메시지 칸에 써 넣기 시작했다. 나는 잘 지낸다고. 안부 물어 줘서 고맙다고. 요즘 날씨가 이러저러하다고. 건강 잘 챙기라고.

   나는 우리의 메시지 교환이 금세 끝나리라고 짐작했다. 돌아올 답장은 「그래, 잘 지내.」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혹은 답장이 돌아오지 않거나(되도록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추측은 빗나가 버렸다. 돌아온 그 사람 답장은 첫 마디부터 ‘이제부터가 본론이야.’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근데 있잖아…….」

   그때부터 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나는 옛날 얘기를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이 꺼내 놓는 옛날 얘기에 대해 내가 이런저런 반응을 내놓는 형식의 대화였다. 

  물론 내 쪽에서는 여전히 할 말이 변변찮았다. 「그래, 그랬었네.」나 「미안하다.」는 정도의 반응이 내 최선이었다. 이제 와서 「아니, 그건 니 입장일 뿐이지. 니 입장이 사실은 아니잖아.」라 따져 물으며 내 입장을 밝힐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왜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너 아픈 것만 생각하냐? 우리 같이 지내면서 너만 힘들었어? 나도 치사하게 하나하나 다 얘기해 볼까?」라 추궁하며 공정한 잘잘못을 가려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상심하거나 실망해서 맥이 풀린 게 아니었다. 그저 둔감하고 또 둔감할 뿐이었다. 





   그 사람은 ‘그때 우리’라는 과거를 현재로 가져올 수 있었지만, 나는 ‘그때 우리’라는 과거를 과거 속에서 꺼내 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그 사람의 오늘 마음을 건들 수는 있어도, 내 마음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나는 그저 둔감하고 또 둔감할 뿐이었다. 나는 한 번 끝이면 정말 끝인 사람이었다. 뭔가를 끝내는 게 죽도록 어렵지만, 결국 끝나 버린 것들로부터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 연락 받고 마음이 스산해질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그 사람에게 줄 상처도 없고, 받을 상처도 없었으니까.    





   내가 세 번째로 그 사람에게 사과했던 때였다. 그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아니, 말이 뭐 그래? 뭐가 자꾸 미안하대?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이 목소릴 높였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가벼운 감기에 걸린 건지, 어쩌다 목이 좀 쉬어 버린 건지, 목소리가 약간 탁했다.

   “미안하니까.”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뭐가 미안한데? 진짜 미안한 마음이긴 해? 그냥 나한테 대꾸하기 싫어서 미안하다 하는 건 아니고?”

   “아닌 거 너도 알잖아.”

   “그럼 뭐가 미안한데?”

   “니가 아직 그 시절에 마음 쓰는 거, 거기에 내 책임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때는 미안하단 말 죽어도 안 하더니.”

   “그때는 그게 미안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뭔데?”

   “그냥 같이 겪는 일.”

   내 대답이 끝난 뒤, 수화기 너머에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냥 같이 겪는 일.”

   그 사람이 내가 한 말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이번엔 내 쪽에서 침묵했다.

   “너는 다 끝나 버린 거지?”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 사람이 내게 물었다.

   “뭐가?”

   그 사람 질문의 의미를 알면서 나는 그 사람에게 되물었다.

   “우리 사이. 너한테는 다 끝나 버린 거지?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 그때 니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때에서 너는 벗어나 버렸으니까. 이제 마음은 없고 책임감만 남아 있으니까. 근데 나는 혼자서 계속 마음 쓰니까.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 자꾸 마음 쓰는 나한테 니가 줄 수 있는 건 마음이 아니라서.”

   “내 잘못이 없긴 왜 없어.”

   “그거 물은 거 아니잖아.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

   그 사람 말투는 단호했다. 그 단호한 말씨는 아픈 사람의 작은 비명처럼 들린다. 미안하다. 어쩌자고 여태 아픈가.

   나는 다시 입을 다물고 수화기 너머의 적막에 귀를 기울였다. 끝내자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모든 게 다 끝나 버렸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사람 내면의 어느 곳을 해치는 말 같아서 도저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모든 걸 다 끝내 버린 주제에, 모든 게 다 끝나 버렸다는 말만은 끝내 토해내지 못했다.

   얼마 뒤 전화가 끊겼다. 그 번호로 내게 전화 걸려 오는 일은 영영 없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한 통 온 적은 있었다.

   「얼굴도 보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잔 말은 하지 말았을 걸. 그땐 그렇게 말해야 구차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결국 구차해진 건 나네.」

   그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 답장을 바라고 쓴 메시지도 아닐 것이었다.    





   오래된 기억이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두 사람이 오래 함께할 수는 있어도, 이별하는 방식이 다른 두 사람은 오래 함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준 세월이었다. 두 번은 없는 내게 두 번째로 온 그 사람은 내가 주지 않은 상처를 안고 내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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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과 산문집을 발행하는 WRIFE MAGAZINE은 ‘나’와 ‘나’가 만나 ‘나’와 ‘너’가 되고, ‘나’와 ‘너’가 어우러져 ‘우리’가 되는 모든 순간들을 담아냅니다. WRIFE MAGAZINE의 시선과 마음과 글이 머무는 곳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책 속 한 문장 :


사랑에 빠질 때마다 나는 사랑을 정의하거나 해석해 보려 하는데, 그 일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리고 얼마큼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 실패가 멋진 일이라 생각하게 된다. 끝이 나오지 않은 일은 내 선에서 끝낼 수 없다. 사랑의 과정과 그 끝에 뭐가 있는 줄 모르기에 나는 내 생애의 사랑을 제멋대로 종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산문집『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실력이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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