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에선, 지금보다 더 다정했을 나를 상상해.
우연한 행운의 한 발짝거리에 불행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그날 무사할 수 있었던 대가로 목숨 일부를 현장에 저당 잡히고 온 것처럼 헛헛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p.17
"그런데 그 날뛸 줄 알았던 녀석이 기운이 쭉 빠져서는 그러더라고요. 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을 구하느라, 우리가 죽어야 하냐고요."
"그래, 내 머리가 기억하는 건 마음대로 바꾼다고 하자.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건, 어떻게 되는데?"
....똑똑한 거? 그래 중요해. 전략을 세우고 거기에 맞게 실행하는 거, 중요하지. 그런데 현장에 나가면 어떤지 알아? 나는 그것보다 내 몸이 기억하는 걸 더 믿어. 내가 똑똑한 놈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정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냥 몸이 기억하는 거지." p.45
"내가 어떻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알아? 내 몸이 기억하는 것들, 의식을 잃고 쓰러져가다가도 내가 내민 팔을 보고 강렬히 움켜쥐는 손, 현장에서 부축해 빠져나오는 동안 뛰는 요구조자의 심장 소리와 숨소리...... 그런 것들이 비로소 실감하거든. 아, 또 구했구나, 나도 살아남았구나. 앞으로도 계속 구해내고 싶다고 말이야."
"실패한 경험이라도 나는 철저하게 더 기억할 거야. 화염에 휩싸인 화재 현장에서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요구조자가 느꼈을 일분일초의 순간들, 불시에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을 준비조차 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만 했을 사람들의 운명까지도.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목숨을 잃은 건지...... 그들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공감할 거야. 그리고 그건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온몸으로 부딪쳐야 가능하지."
주눅 들지 마. 무슨 일이 있으면, 꼭 구해줄게.
"게다가 앞으로는 트라우마도 물리적 치료가 가능하대요. 좋지 않은 기억만 따로 구분해서 없애는 게 가능하고요....... 그 처참한 광경들, 요구조자를 구하지 못한 일, 정말 없던 일처럼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누군가의 죽음까지도."
경기 북부 상가의 화재 현장에서 태주는 부상을 당했고, 현재 혼수상태이다. 그는 소방관의 심리 안정을 위해 개발된 '루디'라는 로봇과 함께 신경세포 트라우마 치료를 진행 중이다. 루디는 환자의 기억 속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동하는 실패의 경험을 반복 학습을 통해 긍정적 경험으로 변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루디와 심리치료와 동시에 과거 트라우마 현장을 누비는 그는 괴롭고 힘든 기억조차 잡으려 노력한다. 잊으면 더 편한 거 아닐까? 안일하게 생각했던 건 나였던 거 같다. 실패한 경험을 더 철저하게 기억하고, 몸이 기억하는 대로 현장을 누비며 요구조자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둘 다 살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평소 소방관의 예우나 PTSD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었기에 이 소설을 집중해서 읽은 듯했다. 화재 현장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나중에 나오고, 나오고 나서도 추가 붕괴되는 건물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삶. 내 주변에는 소방관이 없다. 만약 내 지인이나 가족이 소방관을 하겠다고 하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을 것이다. 소중한 나의 가족과 지인이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니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내가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사람들은 돕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목숨을 걸고 싶지 않다. 기사를 보다가 가장 슬픈 것은 가끔 자살 시도를 하거나, 방화로 인한 화재로 인해 순직하는 소방관의 소식을 들을 때다. 그들은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고, 남편이고, 부모일 건데...
우리나라의 소방관에 대한 복지나 예우가 참 부족하다고 느낀다. 루디처럼 현장에 최첨단로봇이 함께해 물을 같이 뿌리고, 현장에서 끔찍했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태주의 말... 처절하게 살아왔던 삶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가지고 또 다른 삶을 위해 나아가는 모습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잊고 싶은 기억이 얼마나 많았나. 이 기억만 없으면 조금 더 행복했을 텐데. 누군가를 쉽게 잊을 수 있으면 더 편했을 텐데. 그런데 글을 읽고 나니 아니었다. 그런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 그 기억들이 사라지면 지금의 '나' 역시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적이 없다면 누군가가 상처를 주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상처가 어쩌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는 했지만 그게 아니라고, 그 여인은 그냥 모이를 준 게 아니라고, 그리고 바로 쫓아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게 무슨 상관일까? 게다가 이 상황이 이토록 예민하게 받아들여야(할) 문제이기는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이 순간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지나면 기억조차 하지 못할 순간처럼 여겨졌다. p.62
그래, 별것 아닌 일이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p.66
병원 근처에 출몰하는 비둘기 무리가 있다. 건물 관리인 장 씨는 늘어나는 비둘기 배설물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근처 13 구역이 스마트시티로 재개발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스마트시티가 되면 첨단 기술로 도배될 것이고, 건물 관리인인 장 씨도 이에 묘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도시화되고 첨단화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고, 장 씨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지금 현재 건물에 나타나는 비둘기 똥을 줄이는 것뿐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M은 장 씨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지만 현실적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장 씨에 살살거린다. 그리고 장 씨에게 잘 보이려 비둘기 모이를 주는 도시락 가게 여자 이야기를 장 씨에게 한다. 그녀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나'는 묘하게 그 상황이 어딘가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나서기에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에 잠자코 있었다. 얼마 후, 비둘기 모이를 주던 여인은 도시락 가게를 그만두었다. '나'는 묘한 마음의 불편함을 느낀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일을 그만두었던 것인지에 대한 건 알 수 없다. 마음이 쓰이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넘기고 나면, 그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여자는 비둘기 모이를 주다가 수상한 비둘기인 듯 비둘기가 아닌 정체를 만난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지켜봤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상사가 있을 때 그에게 칭찬하고 예찬하다가 그가 떠나면 바로 흉을 보거나 욕설을 내뱉은 동료들.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말 상사가 잘못할 때도 있고, 상사 앞에서 욕을 하거나 비난할 수 없으니 그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마저도 못하게 하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하지만 가끔은 그 '불의'한 행동에 마치 내가 동참자가 된 기분이 들 때마다 들었던 묘한 죄책감 같은 게 있었던 거 같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행동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들키거나 상사에게 알려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수많은 CCTV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사소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삶. 그들에겐 별수롭지 않게 툭 던진 말이 누군가의 밥줄을 끊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었을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처리한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그 대수롭지 않은 일에 분노했다. 그래서 도시락 가게의 여인처럼 조용히 그들을 떠났다. 하지만 어딜 떠돌아다녀도 그런 사람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느낀 건 그들이 꼭 잘못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었다. 어찌 됐든 그들은 그들의 밥줄을 지켰고, 나는 그 밥줄을 잃었으니 결과로만 보면 그들의 결정은 꽤 훌륭했다.
그 대수롭지 않은 일을 발견하는 것조차 너무 희미해졌기에 그거 잠시 대수롭지 않은 일에 멈춰 선 것만 해도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할 만큼 세상이 삭막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지금은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 다음에도 대수롭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언니는 뭔가를 헤아릴 때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짚어가는 습관이 있었죠. 내가 언니를 지켜보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 그런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언니는 모를 거예요. 이날의 만남이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는 걸요. 무수히 많은 ㅅ너택과 우리가 알아볼 수 조차 없는 힘들이 만들어 낸 소우주들이 마주침이라는 사실을요. p.73
창가에 선 채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매일 밤 어두운 골방에서 창문을 열고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찾아 헤매었을 레나를 떠올렸다. 잦은 감기와 근육통. 케일리와 매슈. 어둠. 고양이. 그리고 여행용 가방을 끌고 평행우주를 건너는 그녀. 잠시 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어쩌면 그 이면에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 증상을 방치함으로써 점점 더 심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다고, 모두에게 보란 듯이 드러내고 싶어서. P102
거기서 풍겨오는 서늘함 같은 것.. 그건 그것이 누군가나 무엇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체념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표정을 너무 잘 알았다. 그건 그 계절에 내가 자주 지을 수밖에 없었던 표정이기도 하니까. p107
소중한 생명들이 그 섬에 무사히 도착해,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으며, 그 순간 함께 웃음 짓고 있는 옆 사람과, 그 옆 사람과, 또 그 옆 사람의 표정과 향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이 기억을 간직해야지, 꼭 간직해서 훗날 내 아이와 함께 이곳에 다시 찾아와 들러줘야지,라고 가슴에 새기기도 하는 그런 세계가, 이 우주 건너 어디엔가 꼭 존재하기를, 온 마음을 담아 소망했다.
레나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먼지 묻은 앨범을 뒤적이다 발견하게 되는 반가움이나 미련 같은 것들. 이유 없이 샘솟는 사랑스러움. 사람을 무장 해제시켜 버리는 미소, 남몰래 구겨 주머니 속에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 무방비 상태에 갑자기 덮쳐 오는 후회 같은 것들. 그게 레나라고.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내가 언니를 떠난다고 해도 슬퍼하지 말아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이렇게 계속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나도 아이인데, 로비가 중얼거리면, 닥터 주는 너는 특별하잖아, 라며 로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닥터 주가 손으로 머리를 흐트러뜨리거나 쓰다듬을 때면 로비는 몸을 움츠리거나 손길을 피했지만 실은 그 순간 기분이 꽤 괜찮았다.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로비는 어떤 섬뜩함을 느꼈다. 그건 적개심이라거나 경계심 같은 게 아니었다. 무심함. 저토록 시선에 아무것도 담지 않을 수 있다니. 그 눈빛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로비를 따라다녔다. P.134
특별한 아이. 로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면 나도 무처럼 될 수 있는 건가? 로비는 늘 가슴속에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무를 떠돌렸다. 무처럼 특별한 사람, 로비만의 신화를 만들고 싶었다. P.150
문득 로비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짐이라는 존재가 오롯이 무사하기를, 어디서든 건강하기를. 그리고 그건 나짐도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P.155
바다에는 소리의 길이라는 게 있어. 바닷속 모든 소리가 한데 모여 아무 멀리까지 뻗어나가는 그런 통로 같은 거야.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고래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도 그 소리의 길 때문이거든. P.165
그 틈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그 어떤 목소리도 여자에게 닿지 못했다. 대신 거울들이 생겨나 여자를 에워쌌다. 거울은 끝도 없이 만들어졌다가 깨졌다가 다시 생겨나길 반복했다. 그럴수록 여자가 볼 수 있는 건 거울 표면에 떠오른 것들뿐이었다. 거울에 비친 건 그녀의 분신들이었다. 그녀를 염려하고, 조롱하고, 위로하고, 상처 입히고, 비웃고, 결국에는 끝장내고 싶어 안달하는 그녀 자신이었다. p.208
침묵으로 상처 입은 사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침묵으로 상처를 줘요. 다른 이의 목소리가 닿지 못했다는 건, 나 역시 그들에게 닿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했지요. p.210
나는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더 이상 기억을 지울 필요 없다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말들의 끝에 맴도는 말은 하나였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괜찮아질 수 있다면, 영영 잊어도 괜찮아요. 나를 지워도 괜찮아요. p236
[여자의 계단]
카니발은 분명 즐거운 날일 테지만, 분명 누군가는 무엇인가가 두려워 어두운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을 거야...... 그런 사람들에게 방법은 두 가지야. 다른 사람들처럼 가면을 쓰고 광장으로 나가던가, 아니면 광장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어딘가에 숨는 거. P.259
그러다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이 그린 씨앗을 바라본다. 황톳빛 대지에 심어진 작은 씨앗이다. 씨앗은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고, 또 누군가와 항상 함께 하지 못할 것이다. 자라면서 동물에게 짓밟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씨앗은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릴 것이다. 단단하게 지탱하며 점차 자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도 아름다운 그것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것이다..... 그것은..... 꽃이다. 아주 붉고 생명력 넘치는 싱싱한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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