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i Mar 13. 2018

딸에 대하여, 김혜진 (2017)

어쩌면 내 모습일지 모를 딸에 대하여


민음사에서 나오는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관심있게 보는 편이라 따로 매대에 놓이기 전부터 눈길이 가던 책이었다. 그래도 자꾸 머뭇거리게 됐다. 왜냐면 난 딸이니까. 뭔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딸의 동성연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니 또 젠더에 관한 이야기겠거니 싶어서 가뜩이나 머리도 아픈데 하는 생각에 선뜻 집어 지지가 않았다.


사실, 이 책은 딸에 대하여가 아니라 엄마에 대하여가 맞을 수도 있겠다. 갑자기 독립을 했던 30대 딸이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다시 60대 엄마 집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도 '인정하게 되면 딸을 포기 하는 것 같아' 인정할 수 없는 딸의 동성연인과 함께. 세상을 원하는 모양대로 당장 바꿀 수는 없어도 멈추지 않고 소리를 내는 딸과, 푸른 젊은 시절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져 버린 젠 사이에서 이리저리 자신을 투영하는 엄마. 그럴때마다 늘 마주하게 되는 딸의 연인. 엄마는 젊음과 늙음을 목도하며, 사회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서 자기검열로 온 몸을 두드려 맞는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가지고 과보호적 부모의 프레임으로, 소수자 생존권의 프레임으로, 페미니즘의 프레임으로 볼 수 있겠으나 나는 그 보다 다른 쪽에 더 마음이 쓰인다. 나는 어떤 딸일까, 나는 어떤 엄마가 될까. 나는 내 젊음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란 생각이 먼저라 울렁이고 저릿하다. 정말로 마음이 재릿재릿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p.30)


당장의 오늘과 내일이 너무나도 중요한 아주 지독한 근시쟁이가 되었다. 불안에 의한 불신과, 믿음과 비례하는 서운함을 넘어선 배신감 뭐 이런 것들로부터 나를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슬슬 하나둘씩 내려놓게 됐다. 대신 내가 열심히하면 얼추 그만큼의 댓가를 얻을 수 있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고(대부분은 회사일과는 다른), 내가 못 할 것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원래 내 것이 아닐 것이라는 둥 해도 별로 일 것이라는 둥 전형적인 신포도 증후군에 빠져버렸다. 그게 내일의 서른 셋의 나를 만든다고 생각하니 뭔가가 쿵하고 떨어져 파도가 인다. 나, 이랗게 시간밖으로 천천히 밀려나다 떨어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삶에서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 이 골목을 빠져나가면 저 모퉁이를 돌면 정확히 바로 그때에 짠, 하고 나타나는 것. 언제 어디서나 득시글거린다는 것. 왜 아무도 이런 것들을 미리 말해 주지 않는 걸까. (중략) 나는 있지도 않은, 어쩌면 창 너머 어둠 속에서 우글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뱀을 쫓으며 이를 악문다. (p.114)
여전히 내 안엔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내가 있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내가 있고, 그걸 멀리서 지켜보는 내가 있고, 또 얼마나 많은 내가 끝이 나지 않는 싸움을 반복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일일이 다 설명할 자신도, 기운도, 용기도 없다. (p.195)


이 부분이 아주 좋았다. 정말 내가 읽은 모든 책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원래 이렇게 매사가 씁쓸한 걸까 싶을 정도로 허하다. 마음을 주면 다 멀어진다. 내가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없는건지, 그냥 그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내가 행동을 하는건지, 변한 건 난데 남 탓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쿨하지 못해 미안할 뿐. 아 더럽게 핫하네 정말.



마음은 왜 항상 까치발을 하고 두려움이 오는 쪽을 향해 서 있는 걸까.(p.129)


이 문장 정말 완벽하게 마음에 들어 저 심각한 내용 중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두려움을 향한 까치발이라니. 어짜피 모든 에너지는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하니까 이건 뭐 엔트로피증가의 법칙의 문학버전이라고나 이해해야하나. 나에겐 이런 것들이 책을 읽게 하는 하나의 아주 큰 재미다. 차마 언어로 치환되어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내 속의 뜬구름들을 너무나도 완벽하고 낭만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의 문장들 말이다. 이 작가는 아무래도 고수임이 틀림없다.


누군가를 향해가는 어떤 마음들을 위해


오랜만에 공감받고, 위로받고, 생각케 하는 좋은 소설이었다. 꼭 엄마-딸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놓을 수 없는 무엇의 관계를, 젊음과 늙음의 이분법이 아니라 그 연속의 상호작용을 포기하지 않아야지. 그래야 하소연 할 곳도, 위로 받을 곳도 없다고 느껴지는 늦겨울, 이제는 초봄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날에 딱 하루만큼씩의 성장이 가능해지질테니까 말이다. 끝까지 내 마음의 북을 사정없이 울려댄 작가의 말로 마무리한다.


'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난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말
매거진의 이전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195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