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quiri
“간결한 문체는 위대한 정신의 전유물이다.
Only great minds can afford a simple style.”
- 스탕달
장황하게 쓰는 것보다 간결하게 쓰는 편이 훨씬 더 어렵다. 간결한 문장은 고도로 함축적이다. 더 적은 단어로 더 많은 것을 담을 줄 알아야 간결하게 쓸 수 있다. 간결한 문장은 각종 형용사와 미사여구가 치렁치렁 매달린 문장보다 편히 읽히고, 힘이 있다.
어떤 칵테일은 잘 쓴 문장을 닮았다. 다이키리(Daiquiri)가 그렇다. 많은 클래식 칵테일이 그렇듯 다이키리의 재료는 단 세 가지다. 베이스 스피릿인 럼, 라임 주스, 그리고 설탕(또는 설탕 시럽Simple Syrup). 다이키리처럼 베이스 스피릿, 시트러스, 그리고 스위트너를 중심으로 설계된 칵테일을 한데 묶어 "사워Sour" 칵테일이라고 부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위스키 사워Whiskey Sour가 그렇듯 계란 흰자가 추가되는 경우도 있고, 사이드카Sidecar처럼 큐라소나 다른 리큐르가 가세하기도 한다. 더러는 허브와 보태니컬로 층위를 더한다(진 사워 계열의 칵테일인 라스트 워드Last Word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럼, 라임 주스, 설탕만 가지고 만드는 다이키리는 사워 칵테일 중에서도 가장 단순하고도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간직한 칵테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간결한 문장의 힘이 그 함축성에 있다면, 다이키리의 단순한 조합의 힘은 균형에 있다. 여러 재료들 사이의 밸런스가 중요하지 않은 칵테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다이키리는 재료가 세 가지에 불과한 데다가 각각의 재료가 마치 원색처럼 가장 원초적인 맛을 내기 때문에 밸런스는 생명이다. 라임 주스를 너무 많이 넣으면 산미가 너무 강해 마실 수 없게 된다. 설탕을 너무 많이 넣으면 그저 달기만 한 음료가 된다. 라임과 설탕의 배합이 알맞아 산미와 단맛이 끼리끼리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더라도, 기주인 럼이 이들에 가려지면 이번에는 칵테일이라는 정체성이 무색해진다. 여러 재료가 들어가는 칵테일이라면 한 가지 재료가 약간 많거나 모자라더라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다이키리는 민망하게도 약간의 오차만으로 결과물의 맛이 변하곤 한다. 그래서, 다이키리 맛있게 만드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장황한 문장보다 간결한 문장이 더 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오죽하면 미국에서는 "처음 간 바에서는 일단 다이키리를 주문하라. 다이키리가 맛있으면 다음 칵테일을, 맛없으면 맥주나 드시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이다. 일본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는 다이키리가 아니라 김렛Gimlet을 주문하라고들 한다. 김렛 또한 베이스 스피릿인 진, 라임 주스, 그리고 설탕으로 이루어진 칵테일이니,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이키리를 잘 만들기 어렵다는 건, 반대로 잘만 만들면 다이키리만큼 훌륭한 칵테일을 찾기 쉽지 않다는 얘기도 된다. 간결한 문장이 장황한 문장보다 더 힘 있는 문장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 만난 바텐더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그 유명한 올드 패션드나 네그로니가 아닌 다이키리를 이야기하는 것만 보더라도 다이키리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밸런스가 잘 잡힌 한 잔의 다이키리는 술맛, 신맛, 단맛의 거룩한 삼위일체와도 같다. 시원하고, 상큼하며, 잘 질리지도 않는다.
단순함의 이점은 무한한 확장 가능성에도 있다. 재료 하나의 비율을 약간만 바꿔도 인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취향에 맞춰 레시피를 변형하기가 용이하며, 실제로도 당장 수십 가지의 다이키리 레시피를 약간의 검색만으로 찾을 수 있다(물론, 그 수십 가지의 레시피가 모두 좋은 레시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산미가 도드라지는 레시피를 선호한다면 라임 주스의 비중을 늘리면 되고, 럼맛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레시피를 선호한다면 라임 주스와 설탕의 비중을 줄이면 된다. 물론 베이스 스피릿인 럼의 종류를 바꾸는 방법으로도 변주를 줄 수 있다. 자메이카 럼이나 아그리콜 럼을 활용해 만든 다이키리는 전통적인 스패니쉬 럼으로 만드는 다이키리와는 전혀 다르다. 다이키리는 럼, 라임 주스, 설탕이라는 윤곽만을 제시하는 색칠놀이 그림책과도 같다. 어떤 색깔을 채워넣느냐는 각자의 취향에 달린 일이다. 물론 술맛, 신맛, 단맛의 전체적인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내가 선호하는 다이키리 레시피는 뉴욕, 런던 노마드NoMad 바의 디렉터 피에트로 콜리나Pietro Collina의 레시피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Daiquiri
according to Pietro Collina & revised by Juno
60ml Flor de Cana 4 Extra Seco Lightly Aged Rum
30ml Fresh Lime Juice
17.5ml Simple Syrup (2:1)
Shake and serve in chilled coupe.
내 레시피는 콜리나의 레시피에서 심플 시럽의 양을 5ml 줄인 것이다. 콜리나의 레시피는 약간 달다. 모르긴 몰라도 미국과 한국에 유통되는 라임의 산도가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단맛은 산미를 잡는 역할을 하니까, 신맛이 강한 라임을 쓴다면 설탕을 더 많이 넣어야 밸런스가 잡힌다). 어떻든 이 레시피는 꽉 찬 바디감의 균형 잡힌 한 잔을 만들어낸다. 넉넉히 들어간 설탕 시럽 덕분에 라임의 날카로운 산미는 잘 느껴지지 않고 상쾌함만 남는다. 이런 말이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이키리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로 그런 맛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안타깝게도 플로르 데 카냐Flor de Cana 4년 숙성 럼은 한국에 수입되지 않는다(12년 숙성 이상으로만 들어온다). 국내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라이트 럼인 바카디 화이트Bacardi White나 아바나 클럽 3년Havana Club Anejo 3을 사용한다면 위 레시피를 약간 조정하여야 한다. 바카디 화이트는 바디감이 부족해 럼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므로 라임 주스와 설탕 시럽을 전체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고, 아바나 클럽 3년은 플로르 데 카냐보다 단맛이 강한 편이므로 설탕 시럽을 줄이거나 라임 주스와 설탕 시럽을 모두 줄이는 것이 좋다. 약간 여유가 있다면 디플로마티코 플라나스Diplomatico Planas 럼을 사용해보는 것도 좋다. 47%의 높은 ABV를 자랑하므로 상술한 두 럼보다는 위 레시피에 더 잘 어울린다. 색다른 다이키리를 찾는다면 햄든Hampden 자메이카 럼과 포스퀘어Foursquare 바베이도스 럼을 블렌딩한 프로비타스Probitas를 사용해 보자. 자메이카 럼 특유의 펑키함이 제법 또렷하게 느껴지므로, 평소 라임 주스와 설탕 시럽의 비중이 크지 않은 레시피를 사용한다면 최소한 위에 소개한 레시피의 비율(6:3:1.75~2.25) 정도로 산미와 당도를 끌어올려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시원하고 상큼한 다이키리는 카리브해의 해변을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키리는 실제로 쿠바에서 탄생한 칵테일이다.
쿠바는 원래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1895년 쿠바인들은 스페인에 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켰고, 1898년에는 미국이 개입하면서 쿠바 독립 전쟁은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번졌다. 같은 해 미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스페인은 식민지였던 쿠바에서 철수했고, 쿠바는 독립국이 되었다.
스페인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미국인들이 돈 벌 기회를 찾아 쿠바로 밀려 들어왔다. 개중에는 카네기 철강 회사의 직원이었던 광산 엔지니어 제닝스 콕스Jennings Cox도 있었는데, 그가 일하던 광산은 산티아고 데 쿠바의 동남쪽에 위치한 '다이키리'라는 작은 마을 근처에 있었다. 어느 날 콕스는 미국인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가 평소에 손님들에게 내던 술인 진이 전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봉책으로 쿠바 현지인들이 즐겨 마시던 술인 럼에 쿠바의 특산품인 라임의 즙과 설탕을 넣어 진 대신 대접했는데, 이게 훗날 다이키리로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럼에 라임 즙과 설탕을 넣어 마시는 음용법이 콕스의 독창적인 발명품은 아닐 것이다. 콕스가 미국인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전부터 쿠바의 현지인들이 그와 비슷한 음료를 이미 즐기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영국 해군은 이미 18세기부터 럼에 라임 즙을 섞어서 마시고 있었다. 이게 그로그Grog다.)
다이키리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100% 확실하지 않지만, 다이키리가 미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비교적 확실하다. 1909년 미 해군 장교인 루시우스 존슨Lucius Johnson은 쿠바에서 콕스의 음료를 맛본 뒤 고국에 이를 소개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쿠바의 로컬 칵테일이었던 다이키리는 곧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음료가 되었다. 다이키리를 사랑한 미국인들 가운데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도 있었다. 그는 일평생 쿠바를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며, 쿠바에서 도합 20년가량을 살았고, 이 때문에 말년에는 연방수사국FBI에게 감시를 당하기까지 했다. 헤밍웨이는 또한 어마어마한 술고래였다. 그러니 헤밍웨이가 쿠바 술인 다이키리를 사랑했다는 사실에는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헤밍웨이는 "나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에서, 나의 모히또는 라 보데기타에서My Daiquiri in El Floridita, my Mojito in La Bodeguita"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짐작하다시피 엘 플로리디타와 라 보데기타는 각각 다이키리와 모히또로 유명한 아바나의 술집이다. 그런데 사실 헤밍웨이는 저런 말을 남긴 적이 없다. 헤밍웨이는 라 보데기타를 방문한 적이 없으며, 평생 당뇨를 앓았기 때문에 헤밍웨이가 모히또를 즐겼다는 주장 자체가 미심쩍다. 저 말은 사실 라 보데기타가 마케팅을 위해 퍼뜨린 가짜뉴스다. 그러나 한 장의 거짓말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열 장, 아니 백 장의 진실이 필요한 법. 오늘날까지도 라 보데기타 앞에는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모히또를 맛보려는 관광객들의 긴 행렬이 늘어서 있으니, 마케팅 기믹으로서는 기가 막힌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말의 나머지 반쪽, 그러니까 헤밍웨이가 "엘 플로리디타에서" 다이키리를 즐겼다는 말만큼은 확실히 진실이다. 헤밍웨이는 실제로 엘 플로리디타의 바텐더 콘스탄티노 리발라이과 베르트Constantino Ribalaigua Vert가 만든 다이키리를 숱하게 비웠다. 그런데 잠깐. 헤밍웨이는 당뇨를 앓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이키리에도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가. 그렇다. 헤밍웨이가 즐긴 칵테일은 일반적인 다이키리와는 약간 달랐다. 1937년에 "E. 헨미웨이 스페셜E. Henmiway Special"이라는 (오타 난) 이름으로 엘 플로리디타의 메뉴판에 처음 등장한 헤밍웨이 스페셜Hemingway Special이라는 칵테일은 이렇게 만든다.
Hemingway Special
by Constantino Ribalaigua Vert
60ml Bacardi White Rum
5ml Maraschino Liqueur
5ml Fresh Grapefruit Juice
15ml Fresh Lime Juice
Shake, frappe with ice and servce in chilled coupe.
헤밍웨이 스페셜은 설탕을 씁쓸한 자몽 주스와 마라스키노 리큐르로 대체한다. 응당 그래야 하듯 가당된 자몽 주스가 아닌 신선한 자몽즙을 사용하여 만든다면 단맛은 전혀 나지 않으며, 강렬한 산미에 인상이 다소 구겨지게 된다. 콘스탄티노는 시간이 흐르며 헤밍웨이 스페셜의 레시피를 조금씩 변경했는데, 헤밍웨이의 요청에 따라 럼을 두 배로 늘리고 자몽 주스도 약간 늘린 뒤 얼음과 함께 믹서기에 갈아 슬러시 형태로 만든 버전은 (쿠바인들이 헤밍웨이에 붙여준 애칭을 따) 파파 도블레Papa Doble라고 불렸다. 쉐이커에 쉐이킹하지 않고 이처럼 블렌딩하여 만드는 다이키리를 프로즌 다이키리Frozen Daiquiri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엘 플로리디타에서는 모든 다이키리를 블렌딩하여 만든다. 그러니까 엘 플로리디타에서는 프로즌 다이키리가 곧 다이키리인 셈이다.
이 오리지널 레시피를 헤밍웨이가 그랬듯 '상남자'처럼 들이킬 자신이 없다면, 설탕을 다시 불러들여 밸런스를 맞춘 아래의 레시피를 시도해 보아도 좋다(당뇨를 앓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Daiquiri No. 3
60ml Bacardi White Rum
5ml Maraschino Liqueur
5ml Fresh Grapefruit Juice
15ml Fresh Lime Juice
1 Spoonful Sugar
Shake and serve in chilled coupe.
쿠바에서 다이키리로 명성을 떨친 바텐더이니만큼, 콘스탄티노가 만든 다이키리 변형riff은 헤밍웨이 스페셜이나 프로즌 다이키리 말고도 많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다이키리에 초콜릿을 더한 뮬라타Mulata다.
Mulata
by Constantino Ribalaigua Vert
40ml Lightly Aged Cuban Rum
20ml Creme de Cacao White
20ml Fresh Lime Juice
10ml Simple Syrup (2:1)
5ml Creme de Cacao Brown (optional)
Shake first 4 ingredients and serve in chilled coupe.
[Optional: drizzle Creme de Cacao Brown and let it sink to the bottom of the glass.]
상큼한 다이키리와 초콜릿의 조합이 언뜻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마냥 생소한 조합은 아니다. 오렌지를 초콜릿으로 감싼 유명한 디저트인 오랑제뜨라든지 제주도 특산품인 한라봉 초콜릿도 초콜릿과 시트러스의 조합이다.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오랑제뜨와 한라봉 초콜릿은 맛있다. 그러니 뮬라타가 맛있지 아니할 이유는 하등 없다. 실로, 클래식 칵테일의 세계에서 이 조합은 결코 이례적이지 않다. 럼과 라임 주스 대신 진과 레몬 주스를 사용하고 키나 릴레Kina Lillet를 첨가하면 또 다른 클래식 칵테일인 20세기Twentieth Century가 되며, 이 칵테일은 뮬라타만큼이나 훌륭하다.
Twentieth Century
22.5ml London Dry Gin
22.5ml Kina Lillet
22.5ml Creme de Cacao White
22.5ml Fresh Lemon Juice
5ml Creme de Cacao Brown (optional)
Shake first 4 ingredients and serve in chilled coupe.
[Optional: drizzle Creme de Cacao Brown and let it sink to the bottom of the glass.]
루시우스 존슨이 다이키리를 미국에 전파한 이래, 다이키리는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칵테일이 되었다. 존슨은 1909년 스페인에서 돌아와 워싱턴 D.C.에 위치한 아미 앤 네이비 클럽Army & Navy Club에 다이키리를 처음 소개했는데, 이곳에는 오늘날에도 다이키리 라운지Daiquiri Lounge가 있으며, 존슨을 기리는 명패가 붙어 있다. 미국인들의 유별난 다이키리 사랑을 알 만하다.
다이키리는 미국으로 건너온 지 50년만에 미국의 심장인 백악관에까지 입성하기에 이른다. 헤밍웨이와 동시대를 살았고, 헤밍웨이만큼이나 유명하며, 헤밍웨이만큼이나 냉전이라는 시대의 격랑에 휘말렸던 미국인, 바로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덕분이다. 케네디는 1960년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선거에서 린든 존슨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헤밍웨이만큼이나 다이키리를 사랑했던 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된 날 아내 재클린과 함께 축하주로 다이키리를 마셨다. 취임 후에도 백악관 다이닝 홀에 바를 설치하고 키친 벽에는 재클린의 다이키리 레시피가 적힌 메모를 붙여놓았을 정도였다. 케네디는 백악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다이키리를 비롯한 칵테일을 마시곤 했는데, 최근 공개된 문서들에 따르면 백악관을 주점으로 만들 셈이냐며 불만에 찬 투서를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바의 술인 다이키리로 당선을 축하했던 케네디가 훗날 피그만과 쿠바 사태로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케네디가 즐겼다는 다이키리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은데, 조금 특이하다.
JFK's Daiquiri
60ml Lightly Aged Rum
30ml Fresh Lime Juice
60ml Limeade
2-3 drops Falernum
Shake and serve in chilled coupe.
레시피를 살펴보면 '저게 과연 맛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선 라임 에이드가 눈에 띈다. 에이드는 기본적으로 가당이 된 음료이니만큼 설탕 대신 에이드를 스위트너로 사용한 것 같은데, 용량이 무려 기주인 럼과 동량이다. 1960년대의 라임 에이드가 어떤 맛을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달아서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밸런스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에이드가 60ml나 들어가는 순간 이미 지나치게 희석된, 묽은 칵테일이 된다.
이처럼 썩 훌륭하지 않아 보이는 케네디의 다이키리 레시피를 구태여 소개한 이유는 따로 있다. 단 2-3방울이 들어가는 부재료, 팔레넘Falernum 때문이다. 팔레넘은 카리브해의 영국 식민지였던 바베이도스Barbados에서 유래했는데, 럼 또는 물에 설탕과 라임 제스트, 그리고 정향, 육두구, 생강 등 카리브해 지역에서 나는 향신료를 넣어서 만든다. 럼으로 만들면 알콜을 함유한 팔레넘 리큐르liqueur가 되고, 물을 베이스로 만들면 팔레넘 시럽이 되며, 새콤달달하면서도 제법 맵싸한 향신료 맛이 난다. 직접 만들 수도 있지만, 존 D. 테일러의 벨벳 팔레넘John D. Taylor's Velvet Falernum 리큐르가 가장 널리 쓰인다.
열대 바다의 정취를 가득 머금은 팔레넘은 오늘날 트로피컬 혹은 티키Tiki 스타일의 칵테일에서 필수불가결한 재료로 쓰인다. 티키란 1930년대 미국 서부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칵테일로, 럼과 라임 주스를 기반으로 열대과일이나 향신료를 넣어서 만드는 트로피컬 칵테일을 가리킨다. 정확하게는 칵테일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널리 칵테일과 함께 유행한 폴리네시아풍의 바 문화를 뜻하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이키리는 제닝스 콕스의 독창적인 발명품이 아니다. 영국 해군은 18세기부터 럼에 라임 주스를 섞어 마시고 있었고, 이는 카리브해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이미 보편적인 음용법이었다. 이를테면 그로그Grog가 그런 음료였고, 카이피리냐Caipirinha, 럼 스위즐Rum Swizzle, 콘 앤 오일Corn 'n' Oil도 마찬가지다. 팔레넘처럼 다이키리도 어느 한 사람의 발명품이라기보다는 카리브해 지역의 문화가 빚어낸 산물인 것이다. 다이키리와 팔레넘의 이러한 기원을 생각해 보면, 다이키리에 팔레넘을 섞겠다는 케네디의 아이디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논리타당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다이키리를 티키 내지는 트로피컬의 방향으로 변형하려는 시도는 물론 JFK 다이키리보다 한참 이전부터 있었다. 그 중 로열 버뮤다 요트 클럽Royal Bermuda Yacht Club은 다이키리를 이른바 '티키화tikify'한 칵테일의 표준이라 부를 법하다. 이 칵테일은 (돈 더 비치코머Don the Beachcomber와 함께) 티키 칵테일의 대부라 불리는 바텐더 트레이더 빅Trader Vic이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사료에 따르면 트레이더 빅의 작품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우리의 이야기에서 원작자가 누구인지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Royal Bermuda Yacht Club
60ml Aged Rum
15ml Falernum
7.5ml Orange Curacao
22.5ml Fresh Lime Juice
Shake and serve in chilled coupe.
다이키리가 경쾌하다면, 로열 버뮤다 요트 클럽은 설탕의 자리를 대체한 팔레넘의 각종 향신료가 팔레트에 내려앉아 묵직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오렌지 큐라소가 첨가되어 다이키리보다 더 드라이한 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티키 스타일의 칵테일이 단순한 트로피컬 스타일의 칵테일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로열 버뮤다 요트 클럽을 다이키리의 보다 '트로피컬'한 변형인 호텔 나시오날 스페셜Hotel Nacional Special과 대조해 보면 양자의 차이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칵테일은 1930년대 쿠바 아바나의 호텔 나시오날에서 바텐더인 윌 P. 테일러Wil P. Taylor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열대과일인 파인애플 주스를 투입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트로피컬 스타일 칵테일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그 기원이나 재료의 구성, 플레이버 프로필의 측면에서 티키 장르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Hotel Nacional Special
60ml Unaged Rum
15ml Apricot Liqueur
30ml Pineapple Juice
15ml Fresh Lime Juice
Shake and serve in chilled coupe.
한편 트리니다드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이키리를 비틀었다. 트리니다드의 호텔 이름을 딴 퀸즈 파크 호텔 슈퍼 칵테일Queen's Park Hotel Super Cocktail은, 다이키리에 가향 와인 리큐르인 버무스Vermouth와 석류 시럽인 그레나딘 시럽Grenadine Syrup을 추가한 변형이다. 버뮤다의 로열 버뮤다 요트 클럽과 쿠바의 호텔 나시오날이 다이키리의 원산지인 카리브해와 태평양에만 머물렀다면, 퀸즈 파크 호텔 슈퍼 칵테일은 다이키리에 '유럽적'인 재료를 더함으로써 대서양을 건너 지구 반대편까지 뻗어나간 셈이다.
Queen's Park Hotel Super Cocktail
45ml Lightly Aged Rum
15ml Sweet Vermouth
15ml Fresh Lime Juice
15ml Grenadine
Shake and serve in chilled coupe.
남아메리카에서 유래한 열대과일인 패션프루트와 이탈리아의 아마로인 캄파리Campari를 더하여 양안의 조화를 꾀한 칵테일도 있다. 런던의 바텐더 케빈 암스트롱Kevin Armstrong이 창작한 드라이 다이키리Dry Daiquiri다. 패션프루트의 쨍한 새콤달콤함과 피니쉬에 감도는 캄파리의 진중한 씁쓸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훌륭한 한 잔을 선사한다.
Dry Daiquiri
by Kevin Armstrong
37.5ml Lightly Aged Rum
7.5ml Campari
15ml Fresh Lime Juice
15ml Simple Syrup (1:1)
1 dash Passionfruit Syrup
Shake and serve in chilled coupe.
드라이 다이키리는 2005년에 만들어진 컨템퍼러리 칵테일이다. 럼, 라임 주스, 설탕의 단순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다이키리가 100년이 넘게 흐른 오늘날까지도 계속 바텐더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위대한, 아니 단순해서 위대한 문장들이 수백 년의 세월을 훌쩍 가로질러 여전히 우리들의 문학적 상상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다이키리가 티키 칵테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칵테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이키리에 티키를 가미하여 만들어낸 몇 가지 클래식 칵테일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티키란 무엇인가? 티키는 트로피컬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 좋은 칵테일이란 어떤 칵테일인지에 관하여 티키가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름 해가 뜨거워지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티키 칵테일을, 마이 타이Mai Tai를 렌즈 삼아 다음 챕터에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