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거북이 핀
“5월 25일 오후 14시 26분발, 김포를 출발하는 우리 제주행 비행기는 이제 곧 출발할 예정입니다.”
기장의 낮고 뭉툭한 음성이 기내 스피커를 통해 승객들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 흘러나왔다. 활주로 위에서 잠시 정차 중이던 비행기가 육중한 무게를 겨우 지탱하는 듯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 날개에 달린 네 개의 엔진이 고속으로 회전하자,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져 온 진동과 웅웅거리는 소음이 리안의 좌석 등받이를 타고 뒷머리까지 신경질적으로 흘러들었다. 평평한 지축을 박차고 나갈 때 바닥에서 울리던 날카로운 굉음은 기체가 공중에 부상하기 시작하자 이내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로 바뀌었다. 리안은 창문 밖으로 방금 떠나온 공항이 마치 누가 던진 작은 공처럼 빠르게 작아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륙할 때의 긴장감이 기체의 고도와 함께 서서히 잦아들었다.
비행기는 이제 짙푸른 하늘의 안정권에 접어들며 항속을 유지했다. 리안은 문득 지상보다 공중이 더 편안하고 안정적인 기분이 든다는 것이 신기했다. 땅을 딛고 서 있을 때는 늘 알 수 없는 중압감에 시달렸는데, 오히려 허공에 매달린 지금이 더 자유로웠다. 어쩌면 북큐레이터로 한창 열정적으로 일하던 때가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리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단단하고 흔들림 없던 자신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떠나온 회사의 서가만큼이나, 리안의 마음속에는 읽어야 할 질문들이 가득했다.
리안은 잠시 홀로 두고 온 거북이들을 떠올렸다. 겨우 검지 손가락 한 마디 만했던 작은 생명체들이 불과 일 년이 채 안 돼서 두 배 이상 훌쩍 자라 있었다. 그들의 성장은 리안의 고단하고 흐릿했던 서울살이 속에서, 홀로 선명하게 새겨진 시간의 증표였다. 리안은 문득 동료 가현을 떠올렸다. k문고 입사 동기인 가현은 리안이 떠난 며칠 동안, 퇴근 후 거북이 세 자매가 머무는 리안의 ‘소라게의 집’에 들러 거북이들에게 먹이를 줄 것이었다.
리안은 지난 며칠 동안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세 자매에게 어울릴 만한 이름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고민이었다. 그때,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 리안의 눈에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의 풍경이 들어왔다. 지평선 너머로 무한히 이어지는 장대한 수평선의 광경을 보는 순간, 리안의 머릿속에 퍼뜩 이름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리안이 '대표 선수'라고 불렀던 명민한 거북이의 이름은 ‘태평양’이 되었다. 그 이름을 짓자마자, 마치 운명처럼 남은 거북이들의 이름은 ‘인도양’과 ‘대서양’으로 자연스럽게 완성되었다. 세 자매는 이제 세 개의 바다를 품은, 리안의 부양가족이 되었다. 이름을 짓자마자 리안은 기묘한 깨달음에 사로잡혔다. 마치 엉클어졌던 실타래의 실마리를 단숨에 잡아당긴 듯, 복잡했던 고민이 일순간 해소되는 경험이었다.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세 개의 단추를 채우는 일이 세 배의 노력과 시간이 들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첫 단추 하나만 제자리에 정확히 채워 넣으면, 나머지 단추들은 힘들이지 않고 제 몫의 구멍을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
리안은 그 깨달음의 근원, 자신의 삶에서 가장 먼저 채워졌던 '첫 단추'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것은 거북이라는 존재와 느림의 속도에 대한 신념이 마음속에 처음 새겨진 순간이었다. 여섯 살의 어린 리안에게 아빠가 가르쳐 주었던,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지키는 법. 리안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비행기의 잔잔한 진동은 리안을 시간의 물결 위로 실어 날랐다. 그 끝에는 어린 시절 제주 바닷가의 낯익은 풍경이 여운처럼 감돌며 포근히 맞이하고 있었다.
리안이 여섯 살 무렵이었다. 리안의 가족은 제주 바닷가 근처에 살았다. 그날은 리안의 아빠가 홀로 바다를 떠돌던 작은 고깃배가 정기 점검에 들어가면서, 며칠간 조업이 멈춘 날이었다. 바다는 늘 그에게 차가운 파도와 바람을 맞게 했지만, 뭍은 햇살처럼 다정한 웃음을 품고 세상 가장 안전한 품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아빠는 리안의 손을 잡고 중문 색달리 해변으로 향했다. 리안은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바다의 물결이 닿는 모래사장 가장자리.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앞발로 푸른 거북이 한 마리가 퍽퍽한 모래를 짚으며 필사의 긁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거북이는 움직이는 매 순간 모래에 발목이 잡혀 부대끼는 듯했다. 이 작은 생명체는 인간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수백 년의 시간을 응축한 듯한 완만한 움직임으로 바다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리안아, 저 거북인 백 년도 거 더 사는 거우다. 세상 아무리 빨리 도라 불어도, 저 거북이 속덜이 진실인 게마씀. 리안이도 살멍 세상 속덜에 휩쓸리지 말앙, 리안이 속덜로 살아야 허지.” *
아빠는 리안의 손을 잡고 거북이 푸른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햇빛과 염분에 빛바랜 간판이 걸린 한 해변 상점에 들러 작은 거북이 모양의 머리핀 하나를 리안에게 사주었다. 매끈하지 않은 등껍질 위로, 깊은 바다색 아크릴 조각이 잔물결처럼 일렁이며 반짝였다. 아빠는 작고 동글동글한, 새침하게 기울인 리안의 머리에 핀을 꽂아주며 말했다.
“자, 이 핀 꽂으민 우리 느림보 거북이 리안이 완성이라! 이 핀 볼 때마다 잊지 마라. 느영 속덜로 가는 거주게.” **
아빠의 굵고 투박했던 목소리는 리안의 기억 속에서 파도 소리처럼 느리게 밀려왔다 밀려갔다. 리안에게 거북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평생 걸음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자신만의 시간을 지키라던 아빠의 영원한 상징이었다.
* "리안아, 저 거북이는 백 년도 더 사는 거야. 세상이 아무리 빨리 돌아가도, 저 거북이의 속도가 진실인 거야. 리안이도 살면서 세상 속도에 휩쓸리지 말고, 리안이 속도대로 살아야 한단다."
** "자, 이 핀을 꽂으면 우리 느림보 거북이 리안이가 완성이다! 이 핀을 볼 때마다 잊지 마. 네 속도대로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