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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04화

책 파수꾼

by 오프리

책 파수꾼

리안이 k문고와 맺은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안의 세계는 종이와 활자가 만들어내는 낮은 숨소리가 가득했던 도서관 귀퉁이가 아닌, 지적 열기로 생동하는 k문고의 책장 사이에서 그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대학 시절의 리안에게 서점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시간 이동 장치 같아서, 발을 들이는 순간 자유롭게 현실과 과거, 미래를 오갈 수 있었다. 두꺼운 책 표지를 여는 순간 마음속 감정이 북받쳐 오르던 감동과 신비의 세계였다. 서점은 리안의 꿈꾸는 동산이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방이었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리안은 오랫동안 활자의 숲으로 여긴 갈망의 은신처, k문고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를 잡았다. 지혜와 지성이 숨 쉬는 성채에 두 달간 머무는 특권을 얻은 것이다. 리안은 그 시간을 자신의 존재 이유와 닿아 있는 가치를 밑바닥에서부터 담금질하여 끌어올릴 성스러운 밀약으로 여겼다.

서점이라는 지식의 사원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규율이 있었다. 책을 떨어뜨려 발을 다칠 수 있으므로 가벼운 샌들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긴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어야 했다. 과도한 노출이나 튀는 염색 같은 몇 가지 금기 사항은 리안이 충분히 예상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리안의 청춘을 붙잡고 흔들었던 것은, 물리적인 규정이 아닌 창업자의 철학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객이 한 곳에서 오래도록 책을 보거나 여러 책들을 망설이며 골라 보기만 하고 구매를 하지 않더라도 직원이 참견하거나 눈치를 주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심지어 고객이 책을 훔치다가 발각되었을 때조차도, 망신을 주고 도둑 취급하지 말라는 그 섬광 같은 계시는 리안의 내면에 소리 없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깊숙이 박혔다.


리안은 그 철학을 자신만의 양식으로 온전히 체득한 이였다. 대학 초년 시절, 리안은 용돈 주머니가 늘 얄팍했다. 서점에서 살다시피 하며 그 갈증을 달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리안의 책에 대한 열망은 지갑 속 사정과는 상관없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그 멈추지 않는 목마름은 늘 용돈 주머니를 바짝 마르게 하는 근원이었다. 리안은 이 문제를 독특한 규칙으로 해소했는데, 오직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는 표식처럼 손수 그린 거북이 그림을 새겨 넣은 종이 책갈피를 고안했다. 책을 본 후 책갈피를 읽던 페이지에 슬며시 끼워 넣고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며칠 후, 리안은 다시 서점에 와서 책갈피의 미세한 흔적을 따라 자신의 '비밀 도서'를 찾아 펼쳐보곤 했었다. 그렇게 은밀한 시간 속에서 리안이 완독한 책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밀스레 겹겹이 쌓여갔다.

하지만 거북이 책갈피를 이용한 '비밀 독서'만으로는 더 이상 그 지적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리안을 그 서점 안으로 끌어당긴 것은 단순한 책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서점의 고요하고 질서 정연한 분위기가 자신이 꿈꾸던 세계와 일치한다는 직업적 소명감이었다. 책장 사이를 배회하는 방문자의 역할에 만족할 수 없었던 리안의 열망은, 책의 흐름을 이해하고 독자와 책을 연결하는 일 자체에 대한 깊은 매혹으로 바뀌었다. 그 갈망이 마침내 리안을 k서점 안까지 깊숙이 발을 들이도록 이끌었다.

리안은 그 2개월 동안 받은 급여를 등록금에 보탰다. 그 보다 더 값진 수확은 서점에서 보낸 그 짧은 시간이 리안에게는 존재의 깊이를 더하는 경험이었다. 활자와 종이가 빚어내는 냄새, 그리고 지식의 무게가 내려앉은 침묵. 그것은 미지의 푸른 열망을 해소하지 못한 갈증으로 고독했던 리안에게, 지적 생명수의 마르지 않을 위안이 되었다.


그 여름의 단기 근로 경험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리안은 졸업 시즌을 제외한 나머지 방학 시간도 k문고의 서가로 '복직'을 반복했다. 리안은 단순히 책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 계절에 따른 독자의 구매 패턴, 신간 도서의 미묘한 흐름, 심지어 책장 모서리의 미세한 먼지까지, 서점의 모든 생리를 피부에 새기듯 체득해 나갔다. 실제 근무 기간은 반년도 안 됐지만, 방학마다 반복된 근로는 리안을 단순한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서점의 철학을 이해하는 은밀한 전문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직원들은 리안이 없으면 재고 파악이나 신간 배치에 차질이 생길 정도라며 농담 섞인 진담을 던지곤 했다. 특히 부점장은 리안의 꼼꼼함과 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높이 평가하며, 리안을 두고 "우리 서점의 시간을 가장 정확하게 읽어내는 젊은 파수꾼"이라고 직원들 앞에서 공공연히 칭찬했다. 리안은 그 서점의 공인된 내부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학 졸업반이 되던 해, 리안은 k문고에 일반 공채로 지원했다. 수많은 지원자 사이에서 리안의 이력서는 독보적이었다. 수년간 서점 현장에서 직접 호흡하며 체득한 지식과 열정은 서류 전형을 무난히 통과하게 했다. 최종 면접에서 면접관들은 리안의 남다른 경력과 내부 평판에 주목했다. "서점의 시간을 가장 정확하게 읽어내는 파수꾼"이라는 부점장의 칭찬은 결정적인 레퍼런스가 되어 리안이 k서점에 입성하는데 일조했다. 리안이 그토록 갈망했던 지성의 세계가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준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리안의 대학 시절을 통째로 빚지게 했던 공간. 리안은 이제 그 서점의 시간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리안은 베스트셀러 진열대보다 천천히 읽히는 책들이 꽂힌 서가를 사랑했다. 리안에게 서가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와 같았다. 리안은 서점에서 은밀하게 시간을 훔치는 과거의 자신 같은 사람들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그들의 눈빛은 어둡지 않았고, 오히려 미래를 꿈꾸는 밝은 광채가 어려 있었다. 리안은 그들이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웅크려 앉아 책 내용을 노트에 베껴 적거나, 책장 깊숙한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정독을 가장한 필사 의식을 치르는 것을 모른 체했다. 아니, 그것은 호의가 아니라 창업자가 부여한 성직자로서의 의무였고, 리안은 그 규율을 벗어나는 월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모든 책이 제자리를 찾아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서점의 공간은 리안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높이 솟은 책장 사이를 걷는 행위는 리안에게 마음의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명상과 같았다. 리안은 그 공간에서 세상의 속도를 거스르는 고요한 에너지를 얻었다. 리안의 느림의 미학은 바로 이 공간, 절대적인 관용 속에서 영속적인 가치로 새겨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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