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행의 독서 에세이
◉ 무관심의 폭력
김모세,《르네 지라르, 욕망, 폭력, 구원의 인류학》, 살림
‘무반응’이나 ‘무관심’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보이는 태도다. 싫으면 일단 반응하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멀리하려고 애쓴다. 이는 인간관계의 피곤함에서 나를 지켜내는 나름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를 무시하거나 냉대하는 사람에게도 ‘무반응’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방식으로 응징을 가한다. 그동안 나는 이 방법이 꽤나 괜찮다고 생각해왔다. 주변 사람에게 권하기도 했다. “싫으면 서로 안 보는 게 좋아”라면서 그것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행동이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을 수년 전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치면서 알게 되었다. 순간 골이 서늘해졌다. 기가 막힌 건, 그 책에 밑줄 치고 별도의 표시까지 남겨놓은 사실이다. 부끄럽다.
책은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 보이는 무관심한 태도가 그 사람에게 상당한 모욕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나의 무관심이 누군가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타인에게 무시 받았다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런 더러운 감정은 열패감으로 이어지고, 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의 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 부끄럽게도 나의 무관심으로 인해 상대방이 느낄 감정까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당장의 내 감정을 컨트롤하고 해결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인간은 늘 그런 법이니까.
강조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무반응’과 ‘무관심’의 태도는 상대방에게 무시 받는다는 감정을 갖게 한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너는 내가 반응하고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인간이 아니야’라는 무언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쪽은 모종의 우월적 쾌감을 얻는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증오 범죄의 원인을 규명해보면 ‘무시 받았다’라는 분노의 표출인 경우가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반응’과 ‘무관심’한 태도들은 셀럽들이 활동하는 sns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셀럽은 sns에 주로 게시만 할 뿐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는 대체로 ‘무반응’과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거기에는 “내가 너희들 댓글에 하나하나 반응할 만큼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라는 무시의 언어가 어느 정도는 숨어 있다. 그런데 그런 유명 셀럽은 자신의 ‘무반응’적 태도들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해 줄 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열등감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알까? 그런 ‘무관심’한 태도가 또 다른 타인에 대한 적의와 증오, 혐오 폭력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까?
지금은 ‘무관심’을 못 견뎌 하는 시대다. 누구나 저마다 관심받기를 원한다. 근대 이후부터 그랬다. 개개인이 하나의 주체로 우뚝 서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부여된 지상의 과업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일이다. 자신보다 나은 인간이 “너는 훌륭해, 능력 있는 인간이야, 멋있어”라고 귀에 대고 속삭여 줘야 한다. 이 세계는 인정해주는 사람보다는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다. sns의 좋아요 수는 그런 인정 욕망을 확인하고 인정하고 증명해준다는 착각에 쉽게 빠지게 한다.
정미경의 소설 「못」에는 과도한 인정 욕망으로 인해 일그러지는 남자가 나온다. 그의 삶은 타인에게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와 가치가 나뉜다. 인정을 못 받으면 쓸모 없는 인간이고, 나가 죽어야 하는 인간이 된다. 그는 말한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치는 거야”라고.
이런 흐름 속에서 누구에게나 오픈된 공간인 sns는 인정 욕망을 관철시키고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짐작하듯이 그곳에는 인정 욕망이 우글거린다. 그러나 그 숨겨진 이면에는 증오와 혐오의 감정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이 세계는 치열한 인정 투쟁의 세계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과 격려가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인간으로 변모하고 있는 중 인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시대의 인간에게 타인의 인정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이 세계에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자아를 지켜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독자의 인정 없이 작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가 갈망하는 것이 그 무엇의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실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첩경은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라고 먼저 말해보는 것이다.
“모델이 자기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역으로 자기의 열등감을 확인시켜주는 태도로 여겨서 모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김모세, 《르네 지라르, 욕망, 폭력, 구원의 인류학》, 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