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축제 분위기로 술렁이는 도시의 한 아파트에서 총에 맞은 시신이 발견된다. 이윽고 27살의 여성 카타리나 블룸은 형사를 찾아와 자신이 범인이라고 밝힌다. 카타리나는 그동안 왜곡된 보도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일간지 기자 퇴트게스를 총으로 쏴 죽였다고, 그리고 그를 죽인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되는바”가 없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것은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4)의 시작 부분이다.
사건의 발단은 5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망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성실한 가정부로 일하던 카타리나는 댄스파티에서 만난 괴텐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의 집에서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 이후 괴텐은 떠나고, 이튿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은 카타리나에게 사라진 그의 행적을 캐묻는다.
가택 수색이 시작되고 카타리나는 괴텐을 숨겨주고 그의 도주를 도왔다는 혐의로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첫눈에 반했던 남자가 은행 강도와 살인을 한 수배범이었다는 사실을 카타리나는 경찰에 연행되면서 듣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경찰 심문 과정에서 수사관은 카타리나의 성장배경부터 가정환경, 이혼 경력, 은행의 입출금 내역 등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나온 정보들은 사실과 다르게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기자들에게 던져진다.
경찰 심문에서 카타리나가 했던 말은 조작되어 보도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파티에서 “술에 취한 남자들이 치근거렸다”라는 카타리나의 진술은 “신사들이 다정하게 대했다”라고 바뀌어 조서에 기록된다. 기자 퇴트게스는 인터뷰에서 카타리나가 매우 영리하고 이성적임을 느꼈지만, 기사에는 “얼음처럼 차갑고 계산적이다”라고 쓴다.
언론은 ‘살인자와 매력적인 가정부’라는 제목을 달아 신문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하루아침에 카타리나는 평범한 시민에서 살인범의 약혼녀,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음탕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세간을 떠들썩하게 달구는 주인공이 된다. 그 기자들 중에는 카타리나에게 살해된 퇴트게스도 있다.
거짓으로 부풀려 써낸 기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의혹에서 사실로, 사실에서 이내 진실이 되어버린다. 카타리나의 인격은 철저히 짓밟히고 명예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혀진다. 이런 사회적 살인에 분노한 카타리나는 인터뷰를 빌미로 접근하여 성적 희롱을 일삼는 퇴트게스에게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총성이 울리고 기자 퇴트게스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하인리히 뵐은 작가 후기에서 카타리나는 “살인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녀는 극도로 양심적인 여자이다”라고 썼다. 이렇게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평범했던 한 시민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촘촘하게 따라간다.
그러나 사실 분노한 카타리나의 총구는 선동적인 기사를 써서 재미를 보던 기자 한 사람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다. 사건의 장막 뒤에는 자극적인 기사에 반응하고 열광하는 대중과 그것을 방관하거나 부추기는 언론이 있다. 그들의 열띤 호응 없이 기사는 생산되지 않는다. 언론사는 경영을 위한 많은 구독자를 필요로 하고 대중은 일상의 무료함과 짜증을 달래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와 그것을 해소할 만한 만만한 대상이 필요한 법이다. 카타리나의 총구는 사건을 방기하고 은폐하는 이들 모두에게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따라서 한 사람을 완전히 파멸시킨 무참한 폭력에 대한 책임이 그를 농락한 한 기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것을 가능케 한 언론과 대중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에서 언론과 대중은 ‘드러나지 않는 가해자’라 할 수 있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이 출간된 지 4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 환경은 더욱 척박해졌으며 기자들이 특종 경쟁에 시달려 여전히 자극적인 기사를 생산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은, 지금 시대 우리는 누구나 카타리나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거기에 더해 그것은 우리가 언론에서 만들어내는 선정적인 기사에 동조하는 평범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참혹한 폭력의 이야기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그 안에서 원하는 바를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인격 살해를 당하고 범죄자가 된 카타리나와 그녀에 의해 살해된 기자, 그리고 그것을 부축인 언론사와 여기에 가담한 대중 모두가 폭력의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의 행동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을 사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퍼붓는 혐오와 비난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가 우리의 탐욕을 중단하지 않는 한, 이런 식의 폭력은 계속될 것이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의 ‘안녕’을 묻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