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랑비메이커 Apr 16. 2019

작은 메모로부터 도착하는 온기

언니는 텅 빈 방안에 메모를 두고 가곤 했다.


부모의 품으로부터 나와 언니와 둘이서 삶을 꾸려나간지 어느덧 이 년 하고도 몇 개월. 식구라곤 둘 뿐이지만, 같은 침대 위에서 함께 자고 나란히 붙어있던 책상에서 공부를 하던 때와는 달리 각자의 공간 사이에는 두 개의 문이 있어서. 출근을 하지 않는 프리랜서라 일정이 없는 날에는 온종일 함께인 우리지만, 해가 바뀌고 나서는 낮과 밤, 평일과 주말로 엇갈리며 일정이 늘어버린 우리라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하는 대화보다는 엄지를 눌러가며 전송하는 짤막한 문장으로 서로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곤 하는 우리였다.


이날은 유독 지치고 피로했던 날이었다. 밖은 벚꽃이 피고 지고 날은 더 맑고 청명해졌지만, (나 역시 구경도 못한 건 아니었지만) 여유라는 것이 통 없는 나날의 연속. 수업과 수업, 마감과 기획의 연속. 여전히 <결과를 확신할 수 없음>이라는 변함없는 상황들에 불안한 마음과 옅은 기대가 함께 찾아오던 늦은 귀갓길이었다.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면 얼큰하게 취해있는 어른들이 많아 유독 서로의 귀가를 걱정을 하는 우리였기에 늦은 시각에 들어가는 게 눈치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도어락을 열고서 살곰살곰 발소리를 죽여 곧장 방으로 들어섰다. 그때, 환하게 밝혀진 방 안, 침대 위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통 서로 바빠서
저녁을 같이 보내기가 어렵네.
고생했어. 푹 자.
전기장판 미리 켜놨어.

너의 언니



손바닥 만한 메모지에 담긴 “너의 언니” 아니 “나의 언니”의 커다란 마음이 전기장판보다도 따스하고 다정하게 내게 닿았다. 오늘도 늦었단 잔소리를 듣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내 기분이 조금 더 서글플 것 같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내 생각으로 발을 옮겼다. 이렇게 커다란 마음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작은 메모지를 손바닥에 올려두고서 생각에 잠기다, 얼른 화장실로 가보았다. 물에 젖어 글씨가 몇 개 뭉개지긴 했지만 그대로 있었다. 몇 개월 전, 모임에 나가는 내게 “너무 늦진 말고 내 보조배터리 챙겨가서 써.” 라며, 혹 확인을 못할까 싶어 거울에 붙여둔 메모지. 화장실을 나와, 냉장고 문을 열면서 마주친 몇 년 전 장난스럽게 붙여놓은 스케치북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요리는 정성스럽게 식사는 복스럽게” 언니는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 직선적인 방법이 아닌 부드럽게 우회하는 쪽을 택했다. 걱정어린, 다정한 마음들을 작은 메모지에 담아 투욱, 투욱 붙여두었다.


그 다정한 문장들은 시간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내 마음에 흔들림 없이 자리하고 있을 거다. 어른스러운 척을 잔뜩 하던, 유치하고 여전히 부족한 동생이 위태로울 때마다 부축하고 붙들어줄 문장들. 무표정한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는 언니의 알록달록한 메모지를 통해, 여전히 많은 걸 배운다.









당신의 인디, 가랑비 @garangbimaker 
/매일 한 문단을 남깁니다. 이따금 한 페이지를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를 출간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garangbimaker

매거진의 이전글 이어폰 없이 밖을 나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