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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리셋하겠습니까?

내가 나에게 선물한 이름

by 스텔라윤


'누가 애한테 이런 이름을 지어줬어?

걱정을 잔뜩 품고 살게 할 이름을!'


10년 전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 후 너덜거리는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밖에서 듣고 온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내 이름이 나에게 평안은커녕 걱정을 끌어안고 살게끔 한다는 말이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개명을 결정하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내 삶이 걱정과 거리가 멀었다면 얼토당토않은 싱거운 이야기라며 흘려 들었겠지만, 그 당시 나는 만신창이였다. 응급실까지 실려가게 만드는 만성 편두통과 위염은 나의 걱정 수치가 정도를 넘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뭐라도 바꾸고 싶었다. 변화가 절실했다.



며칠 동안 수소문하여 혼자 철학관에 찾아갔고 그분 역시 단호하게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름이 나에게 부족한 기운을 보충해주지 못하고 이름으로 쓰지 않는 한자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죠? 타고난 본질이 탄탄하니 좋은 이름으로 살면 앞으로는 더 좋을 거예요."


나를 북돋으며 그는 다섯 개의 이름 후보를 건넸다. 이름을 백번 이상 소리 내어 불러보면서 다섯 개 후보 중 가장 부르기에 좋고 듣기에 좋은 이름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묻지 말고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불 꺼진 방, 침대 위에 누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러보았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불리기만 했지 나의 음성으로 불리는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몸서리치게 어색했지만, 눈 감고 잔잔하게 이름을 부르며 여러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짜증스럽게 나를 부르던 엄마의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나조차도 어릴 때부터 은근히 내 이름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학교에 입학하고 사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나를 소개할 때마다 내 이름을 말하는 어감이 별로 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개명을 할 거라는 생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저런 상념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며 500번 이상 이름을 불러보고 부르기에도 듣기에도 가장 편안한 이름 하나를 선택했다.


그렇게 29년 동안 나를 지칭하던 이름이 '리셋'되었고 지금은 내가 나에게 선물한 새로운 이름으로 10년째 살고 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고 인생이 달라졌을까?


개명하고 1년 만에 퇴사를 했고 2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인생 제2막이 열렸으니 이름을 바꾼 것이 삶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삶이 변화할 시기여서 이름을 바꾼 것인지, 이름을 바꿔서 삶이 변화한 것인지, 무엇이 먼저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름을 바꾸고 사회적 성공과는 다소 거리감이 생긴 것도 같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걱정을 끌어안고 살던 나'와도 널찍한 거리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름이 인생을 바꿨다기보다는 이름을 바꾼 후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나는 끊임없이 마음이 담긴 방향을 선택해 왔다. 겉으로 보이는 환경이 개선되었다기보다는 내 안의 공간이 정돈되었다고 할까. 마음이 평안하면 자연스럽게 물질적인 환경도 평안한 흐름을 타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새로운 흐름이 썩 마음에 든다.



물론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름은 그저 껍데기일 뿐, 이름을 바꾼다고 우리 존재의 본질이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이름은 물리적으로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평생을 따라다니는 표식 같은 것이기도 하기에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고 한들 그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이름을 바꾸기로 선택했다.'라는 사실이다.


지금의 이름은 말할 때나 불릴 때나 쓸 때나, 언제나 기분이 좋다. 이름이 기분 좋게 곁을 맴도는 느낌이 든다.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이름과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평안한 것, 그뿐이다. 함께 있을 때 마음에 결림 없이 편안한 사람과 함께일 때 안정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지어주신 분께도 감사하고 이름을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도록 내버려 둔 부모님께도 감사하다.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신 분과의 인연에도 감사하고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감사하다. 용기 내어 이름을 바꾸기로 선택한 과거의 나에게도 고맙다.


이름을 바꾼 것은 살면서 난생처음으로 나의 주도로 눌렀던 귀여운 리셋 버튼이었다.


내 이름은 웃상이다. 이름을 바꾸고 웃음이 더 늘은 것 같기도 :)


+@ 또 다른 이름, 스텔라윤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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