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해도 잘 살 사람 3가지 특징
지금까지 살면서 눌렀던 리셋버튼 중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건 역시 퇴사 버튼이지 않을까. 퇴사라는 선택은 이름을 바꾸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삶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나에게 맞는 직업만 찾으면 곧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직업을 바꾸는 것뿐일 거라고 생각했던 퇴사는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타인의 삶으로부터 나는 뛰어내렸다. 내가 되기 위해 나는 혁명이 필요했다."
구본형 선생님의 말씀처럼 퇴사는 삶의 혁명이었다. 혁명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리긴 하지만, 30년 가까이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따라온 삶의 방식에 의문을 던지고 난생처음으로 스스로 삶을 책임지기로 선택하고 행동했던 순간이었다.
*퇴사에 대한 이야기는 브런치북 <나를 찾아줘>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퇴사 후 10년은 끊임없이 나와 삶을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아니 무슨 자기 탐구가 10년씩이나 걸려?’ 싶지만 그 10년 사이에 삶이 던져주는 크고 작은 일들과 마주하느라 작정하고 탐구 활동에 보낸 시간은 채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적성테스트를 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니 10년 간의 모든 과정이 탐구 과정 실습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삶의 탐구, 자기 탐구>라는 종강이 없는 과목인 듯하다.
퇴사 10주년쯤 되어가니 직장인으로 살았던 시간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아득해서 이제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민망하지만, 퇴사하고 5~6년쯤까지도 사람들은 이걸 가장 궁금해했다.
"퇴사한 거 후회한 적 없어?"
결론적으로는 후회한 적 없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복지혜택과 대출 기회, 생필품 할인 찬스, 해외 출장 기회, 해외여행 지원, 교육 기회 제공, 가족들의 사옥탐방 이벤트 등은 회사 다닐 당시에는 별로 고마운 줄도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참 특별하게 느껴진다. 특히 삼시 세끼를 제공하는 건 굉장히 큰 메리트다. "집에도 가지 말고 회사에서 삼시세끼 먹으면서 일만 하라는 거야 뭐야?"라며 삐뚤어진 사고를 갖고 있었던 과거의 내가 참 못났다 싶다.
물리적인 혜택 이외에도 회사를 다니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업데이트가 빠르다. 알고 싶지 않아도 업계 동향, 최신 트렌드 등을 조사하고 공부해야 하니 세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퇴사 후에는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금세 뒤쳐져서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멀미를 느끼곤 한다. 회사에 있는 게 우물 안 개구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우물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자유로운 개구리로 사는 삶이 더 좋기에 10년 전으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이름 리셋과 마찬가지로 직업 리셋도 버튼을 누르자마자 새로운 삶이 '짠'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자유와 막막함이 동시에 온몸을 휘감는다. 우주에서 지구별에 불시착한 느낌이랄까, 매일 살던 일상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제 나는 누구지?'
본질적 존재에 대한 질문은 다음 화에서 이어질 에피소드를 통해 풀어보기로 하고, 물리적 존재로 존재하며 갖고 있는 기질과 성향, 욕망에 대해 관찰하며 발견한 <퇴사해도 잘 살 사람 3가지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와 비슷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회사 밖 생활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01 주도적으로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
사회 속에서는 ‘관대한, 수용적인, 배려하는’ 등의 키워드가 나를 수식한다. 하지만 나의 삶에 있어서라면 말이 달라진다. ‘주체적인, 독립적인, 마이웨이’ 등의 키워드가 어울린다. 이중적인 게 아니라 두 모습 모두 진실된 내 모습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보다 스스로 호기심과 흥미를 느껴서 시작하고 도전하고 부딪히며 배우는 걸 좋아한다.
그렇기에 시켜서 하는 일이 팔 할 이상이었던 회사생활이 참 갑갑했다. 물론 회사 안에서도 스스로 일을 벌여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며 갈증을 해소하려고 했지만, 늘 목마른 상태였다. 이런 성향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면 무슨 일이든 주도적으로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완전히 착각이었다.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이 성향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사업가라는 정체성은 잘 맞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아닌 듯하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보면 나는 교육하는 일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게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서 도움이 될 수 있고 교육을 위해 만난 사람들과 좋은 에너지를 나누는 시간이 참 좋다. 또 창작하는 일도 즐겁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서 몰입하는 시간에 충만함을 느끼고 내 손을 거쳐 창작물이 탄생할 때의 기쁨도 크다.
퇴사 후 다섯 가지 이상의 직업을 경험하면서 나는 그 모든 직업들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일했다. 조직이 작든 크든 어디에나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있었고 과중한 일로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즐겁게 일했다. 모두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늘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렇기에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
주도적으로 살겠다는 건 책임지며 살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강박으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겠다는 것이다.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고자 하는 이유는 그런 삶의 태도가 자유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02 남들보다 많은 쉼이 필요한 사람
우리 집은 부모님부터 형제들 모두 겉보기에는 운동인처럼 보일 정도로 피지컬이 좋은 편이고 실제로도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좋다고 해서 체력과 에너지가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잠을 많이 자는 편이었는데 학창 시절부터 직장인시절까지 만성적인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결국 어느 순간 에너지가 바닥이 나고야 말았다.
"그럼 체력을 키우면 되잖아! <무쇠소녀단> 못 봤어? 체력도 늘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기초체력을 키우는 훈련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고 나 또한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도 해봤지만, 누구나 똑같은 에너지와 체력을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나의 인생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오랜 임상(?) 결과로 깨달았다.
그렇기에 피곤해도 아파도 쉴 수 없는 회사생활을 루틴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 아프다는 이유로 회사를 쉴 수 없었기에 하루 정도 푹 쉬면서 잠을 자면 나을 두통을 견디기 힘든 만성적인 고통으로 키우고야 말았다. 또 주변 감지 레이더가 발달한 나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경쟁과 압박의 에너지로 똘똘 뭉친 회사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숨만 쉬어도 에너지가 소진되는 환경이었다.
지금은 나만의 리듬에 맞춰서 산다. 쉼이 필요할 때는 쉬고 아플 때는 더 푹 쉰다. 매일 8시간 반 정도 충분히 수면을 취하고 산책하고 운동하고 잘 챙겨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삼시 세 끼를 제공하는 회사는 이제 없지만 내가 나에게 삼시 세 끼를 선사한다. 돈도 시간도 훨씬 많이 들지만 좋은 재료로 직접 요리해서 먹는 식사는 내 몸 마음 영혼을 충만하게 한다.
충분한 쉼, 마음의 여유가 굉장히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세상이다. 요즘의 쉼에는 큰돈이 든다. 쉬고 싶을 때 쉬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기에 우리는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여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삶을 누리고자 한다. 나는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쉬고 싶을 때 쉬면서 산다. 쉼을 뒤로 미루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몸소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03 돈도 좋아하고 명예도 좋지만, 평안한 마음이 기반이 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위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돈과 명예, 평안한 마음은 공존할 수 없다는 편견이 엿보인다. 퇴사할 때만 해도 그렇게 믿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던 내 몸과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니 돈과 마음의 평안은 양극단에 있다고 여겼다. 그 당시에는 돈 대신 평안을 선택했기에 퇴사할 결심도 할 수 있었다. '돈은 어떻게든 벌면 되지. 덜 벌고 덜 쓰지 뭐.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참고 견뎌야지.'라는 마음은 내지 못한다. 돈이 유일한 동기부여 조건인 일은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하고, 내가 자주 말하는 '영혼이 기뻐하는 일'이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영혼이 기뻐하고 재미있고 몰입하고 배우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런 일을 할 때 풍요와 평안은 함께 한다, 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풍요와 평안을 이질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나는 풍요롭고 평안한 삶을 살 것이다.
그럴싸하게 포장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나는 고집세고 게으르고 욕심 많은 사람이다. (게으른데 야망 큰 사람이 최악이라고 하던데!) 하지만 타고난 기질과 고유성을 무시하면서 일에 나를 끼워 맞추기보다는 나의 기질을 존중하며 고유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어떤 틀에서 벗어난 삶을 산다고 해서 실패자, 부적응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퇴사 후에도 끊임없이 비교와 평가가 따라다니지만, 내가 느끼는 비교와 평가조차도 사실 제삼자의 시선을 빌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일 가능성이 많다. 나 또한 10년 동안 유랑자로 살며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었다. 떳떳하게 소개할 직업이 없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삶의 가치가 오직 직업 카테고리 하나만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랑할 만한 건실한 배경이 없이도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기특하고 가슴 벅차기도 하다. 그 어떤 껍데기 없이도 괜찮을 수 있다면 겁먹을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그토록 신경 쓰는 ‘남들’은 사실 우리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자기 삶을 살기에도 바쁘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당연하게도 퇴사 버튼이 정답은 아니다.
무엇을 직업으로 선택하는지보다 중요한 건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일인지, 내 영혼을 기쁘게 하는 일인지, 풍요와 평안을 품게 하는 일인지, 그리고 단순히 일로 써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써 내 삶과 잘 어우러지는 일인지 등등이다. 물론 이것마저도 나의 기준이다. 저마다의 기준이 다를 것이다. 일을 대하는 마음도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그러니 일이든 삶이든 자기 기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면 그만이다.
다만 10년 전의 나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고 있다면, 지금 내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신호일지 모르니 잘 들여다봐야 한다. 질질 끌려다니며 살고 싶지 않다. 두 다리로 단단하게 지지하고 서서 가뿐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싶다.
스스로에게 진실되게 살고 싶고 매 순간을 소중하게 살고 싶다. 여전히 나에게 진실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 진실하게 내 이야기를 듣고 따르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내 인생은 대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