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의 사랑을 리셋하겠습니까?

사랑도 리셋이 되나요

by 스텔라윤


지난 화에 엄마와의 관계 리셋을 기록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엄마 덕분에 진짜 사랑을 알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에게 조건 없이 사랑받지 못했던 경험 덕분에 진짜 사랑을 알게 됐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조건부를 붙였다.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않고 계속 레벨업 해야 하는 게임의 주인공처럼 여겼던 것 같다.




그런 내 앞에 나타난 남편은 나에게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썩은 동아줄인 줄 알고 놓고 도망가려고 했었다. 그는 학벌, 직업, 외모, 성격, 습관 중 어느 것 하나 야무진 게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어느덧 12년째 함께 하고 있다.


썩은 동아줄처럼 보이는 그와의 인연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확실하게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조건 때문이었다.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준다는 것. 그는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어릴 적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가짜 사랑에 휘둘려 인생을 망치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김창옥 강사는 말한다. '결혼은 미지의 세상으로의 투신'이라고. 나는 사랑의 가치 하나만을 믿고 몸을 던져 그와 결혼했다.

unsplash.com
당신이 어떤 위험을 감수하냐를 보면,
당신이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 재닛 윈터슨


운이 좋았는지 그는 나에게 왜곡없는 사랑을 주었다. 그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를 자유롭게 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방어적이고 삐뚤어진 마음을 갖고 있었고 양치기 소년처럼 거짓말도 자주 했다. 그와의 신뢰가 무너져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갈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와의 관계를 놓을 수 없었던 건 우리 관계가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견고한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만난 건 나에게도 조건 없는 사랑을 실험할 기회였다. 본인조차 싫어하는 자신의 밑바닥까지도 끌어안고 다시 일어서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며 그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그는 나의 조건 없는 사랑 안에서 조금씩 방어심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를 상대로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을 매일 연습한다. 자신의 약점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어쩌다가 저런 못난 사람을 만나서 내가 이 고생일까.' 생각하지 않고 '본인은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하는 것. 약점이 하나도 없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의 약점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 남편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그를 존중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 하듯 나에게도 조건 없는 사랑을 연습한다. 남편에 대한 나의 관대하고 헌신적인 마음을 관찰하고 나 스스로를 대할 때도 똑같이 연습해 본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나의 기쁨을 뒤로 미루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는 건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가 아니다. 남편을 오래도록 사랑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나를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 내 안의 에너지가 막힘없이 흘러야 그에게도 청량한 사랑을 줄 수 있으니까.

unsplash.com


사랑을 연습하며 알게 된 건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을 아낀다고 내 안에 사랑이 더 남는 게 아니었다. 사랑은 줄 수록 더 샘솟았다. 사랑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모여드는 습성이 있다. 사랑을 아끼다가 고여서 썩지 않게 그때그때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결국 지 팔자 지가 꼰 거 아니야? 엄마한테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이 사랑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고생만 하다가 후회하며 끝나는 뻔한 스토리 아니야?"


겉으로 보기에는 고생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남편은 나에게 가장 큰 가치를 주었다. 사랑과 자유라는 가치를. 그렇기에 다른 어떤 조건을 요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결혼은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이 만나 서로의 성장을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는 과정이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한 체험의 현장이다. 말은 쉽지만 그 과정은 지지부진하고 때론 혹독하게 느껴진다.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이토록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지,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삶은 사랑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삶의 끝자락에서나 깨달을 법한 사랑의 가치를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지지고 볶으며 누리고 있는 것도 큰 복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많은 걸 내려놓고 조건 없는 사랑을 선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

.

.

.


(다음 화에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