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엄마를 리셋하겠습니까?
(지난 화에 이어서 씁니다.)
엄마는 조금은 변했지만, 여전히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짜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엄마의 감정을 내 탓으로 생각하며 눈치 보고 엄마에게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와 나 사이의 벽을 뚫고 엄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이제는 엄마와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나의 마음을 먼저 살핀다.
가족 앞에서는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가장 못난 모습이 튀어나오곤 한다. 나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자꾸 끄집어내는 가족과의 만남이 진절머리 날 때도 있다. 엄마와 다툴 때면 치를 떨며 '아오, 진짜 성격 이상해. 친구였으면 벌써 손절했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꽤 많다.
한편으로는 서로가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가족의 인연으로 만난 우리가 쉽사리 서로를 등지지 않을 거란 믿음이 은연중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부모님 앞에서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였다면 일찌감치 손절당했을게 분명하다.
우여곡절 끝에도 여전히 투닥거리며 살지만, 이제는 엄마가 그냥 좋다. 엄마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맞추는 게 아니라 그저 엄마라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랑 듬뿍 주는 살가운 엄마였어도 좋았겠지만, 표현에 서툴고 무뚝뚝한 우리 엄마도 좋다. 대신 우리 엄마는 뒤끝이 없고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며 나의 선택을 존중해 준다. 엄마의 예술성과 손재주를 물려준 것도 고맙다. 꼭 비싼 옷이 아니어도 자기만의 스타일로 잘 꾸미는 엄마가 내심 자랑스럽다.
엄마와 자주 함께 여행하다 보니 이제 우리는 꽤 잘 맞는 여행친구가 되었다. 친구였다면 손절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가 친구로 만났다면 은근히 잘 맞는 단짝친구로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는 이유로 과도하게 기대했기에 실망도 상처도 컸을 것이다.
엄마라는 주제만으로도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만큼 엄마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이렇게 눈물 한 방울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엄마와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엄마와의 과거를 글로 쓰는 게 멋쩍기까지 하지만, 혼자 눈물을 삼키고 훔쳐낸 숱한 날들이 있었다. 에세이에 엄마 이야기를 쓸 때는 콧물이 턱까지 흐를 만큼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상처를 씻어내고 스스로를 치유하고 엄마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던 내가 대견하다. '엄마가 그냥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이 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변함없이 곁에 있어준 엄마에게도 고맙다.
에세이를 쓰며 한 가지 깊은 깨달음이 있었는데 엄마와의 관계에서 '누가 먼저 사랑하는지,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엄마에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엄마에게 사랑을 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엄마를 해방시켜 주었고 그와 동시에 나도 해방되었다.
돌아보면 엄마와의 관계가 좋아져서 내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나 스스로와의 관계가 달라지니 엄마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내가 나로 온전하게 중심 잡고 설 수 있을 때라야 누구와도 사랑을 주고받으며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엄마 덕분에 진짜 사랑을 알게 됐다.
나와 다른 상황에 있는 누군가는 차라리 엄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중요한 건 그 선택이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느냐이지 않을까.
“늘 차분하고 안정감 있어 보여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변화를 실감한다. 붕 떠있는 듯 살았던 나는 이제 견고한 땅에 깊이 뿌리내려 평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자유롭다. 다른 어떤 존재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엄마와 제주 사계절 여행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