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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e Jun 28. 2016

'예쁜년 나쁜년 이상한년'에 관하여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에 예쁜 애(A)가 있었다. 연한 눈동자, 빨간 입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긴 속눈썹. 피부도 뽀얀데다 얼굴 사이즈가 도넛만큼 작았다. 얼굴이 유독 예쁜 것도 그랬지만 타이트한 교복 마이 앞섶이 항상 벌어져 있을 정도로 멋진 글래머이기까지 했던 터라 솜털 덜 빠진 새끼오리처럼 꼬질한 여고생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친구였다. 게다가 이 아이, 공부 빼고는 뭐든지 다 잘했다. 노래도 무척 잘 했고, 춤도 잘 추고, 운동도 잘 하고, 피아노도 잘 쳤다. 지가 봐도 예쁘고 남이 봐도 예쁘니 당연히 인기도 많았다.


당시 우리 학교에 교활한 애(H)도 있었다. 지지리 공부를 못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A가 공부를 열심히 해도 못할 애였던 데에 반해 H는 숙제라도 꾸준히 했으면 선두 순위에 들만 한 공부 머리를 가진 애였다. A가 예쁜 걸로 유명했다면 H는 교활하고 지저분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했다. H랑은 3학년 때 짝이었는데 기집애가 얼마나 더러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일주일 씩 렌즈 안 빼는 것은 기본이요(그 렌즈 뺐더니 렌즈에 단백질이 하얗게 끼어있었다.), 교복은 도대체 언제 빨았는지 사방군데 얼룩이 져 있었고(교복도 안 빨아 입는 년이 멋은 또 어찌나 내던지!), 뭐 하나를 먹어도 더럽게 먹고 더럽게 쌓아놓고 하여간 더럽게 안 치웠다. 좋은 머리를 하염없이 나쁜 쪽으로만 굴리는 하양 오랑우탄 같은 친구였다.


어느 날, 이 둘이 싸움이 붙었다. 뭐라 뭐라 서로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다가 궁지에 몰린 H가 애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A에게 소리쳤다. 

"뭐 이 애 뗀 년아!"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뇌가 덜 자랐다고 해도(열여덟이면 사실 할 소리 못 할 소리 구분 못하는 나이도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궁지에 몰려 눈이 돈 H는 그 기가 막히던 머리를 굴려 가장 적확한 타이밍에, 가장 심한 상처를 겨냥해, 가장 비겁한 스윙을 날렸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 모두 경악하고 있는 와중 '아니 이런 썅년이!?' 마음 속으로 눈을 까뒤집은 이가 있었으니 명불허전 내 친구 L이다.


다음 날 새벽같이 등교한 L은 H의 책 바구니와 명찰을 소각장으로 들고 가 전부 다 태워버렸다. H는 그날 교과서도 없고 문제집도 없고 프린트도 없고 명찰도 없어서 매시간 선생님들한테 매를 맞았다. 우리 학교는 0교시부터 8교시까지 있었으니 영문도 모른 채 적어도 9대 이상은 처맞았을 거다. 열여덟 살의 L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새침한 표정을 하고 별다른 수고로움도 없이 H의 망발을 시간마다 응징했다.(콧노래를 부르면서 남의 책에 불을 싸질렀을 L을 생각하면 내가 이 아이의 원수가 아니라 친구인 게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0년 뒤 스물여덟 살의 L은 방화 동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렇잖아, 어디 못생긴 게 예쁜 애한테". 이 이상한 년은 정의나 대의나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때문이 아니라 눈 앞의 아름다운 것이 모욕당하는 게 너무나 싫었던 것이다. 그냥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예쁜년 나쁜년 이상한년'이 있다.

경험 상 그중에 제일 무서운 년은 "이상한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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