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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런: 러닝 투게더, 힐링 투게더

by 정찬승

Mind Run: Running together, Healing together


달리는 길위에서 모두가 하나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봄날 아침, 4만 명 러너와 함께 출발선에 선다. 장내 아나운서의 힘찬 응원, 들뜬 분위기, 비장한 눈빛. 출발선 앞으로 쭉 뻗은 텅 빈 도로는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출발 신호와 함께 커다란 함성이 터지고 모두가 앞으로 달려 나간다. 매년 3월에 열리는 마라톤은 꿈의 무대다. 겨울을 거치며 단련한 심장과 다리로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봄을 달린다. 달리는 길 위에서 모두가 하나다. 러너들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를 응원한다.


마라톤은 참 신기한 운동이다. 대부분의 운동이 상대를 이기기 위해 애쓰지만, 마라톤은 자신을 이겨내는 경기다. 심지어 골인 지점을 앞두고 1, 2위를 다투는 엘리트 선수조차, 탈진한 경쟁자에게 물병을 건넨다. 모두가 함께 달리며 서로를 격려하고 자신의 한계를 넓혀 나가는 스포츠, 그것이 마라톤이다.



시작은 혼자 달리기였다. 코로나 판데믹 시기에 감염병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심리사회방역지침’ 제작을 총괄했다. 연이은 밤샘 작업에 나 자신의 건강이 안 좋아지자 서둘러 운동을 시작했고, 방역 지침을 준수하면서 혼자서 꾸준히 할 수 있는 달리기로 이어졌다. 진료를 마치고 한밤중에 강가를 달리다가, 일찍 일어난 날은 아침에, 휴일에는 조금 더 길게 달렸다. 숨이 차오르는 것도 잠시, 일정한 리듬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사람과 건물이 인사하고, 나무와 강물이 손 내밀고, 바람과 햇살이 나를 살려냈다. 호기심에 이끌려 마라톤 대회를 나가보았고, 10킬로, 하프마라톤,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달리기는 피폐한 시기에 내 몸과 마음을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이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자연스레 나의 시선을 ‘나’에서 ‘우리’로, 동료들에게로 향하게 했다.


함께 달려요, 함께 치유해요


2024년 초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정원 증원 계획 발표를 계기로 의료대란이 터졌다. 전공의는 병원을, 의대생은 의과대학을 떠나야 했다. 정부는 의사와 의대생을 희생양 삼아 공격했고, 사람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연말에는 비상계엄의 충격과 제주항공 여객기 추락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온 나라를 뒤덮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사회공헌을 담당하며 정신건강 위기를 겪는 사람들을 돕고 연대하는 활동을 해온 나는 ‘리치 아웃(reach-out)’과 더불어 ‘리치 인사이드(reach-inside)’가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의사로서 이제는 시선을 내부로 돌려서 지치고 상처받은 동료의 마음을 돌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 자신을 돌보아야 환자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다는 취지에 공감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동료들과 함께 정신건강을 위해 달리는 모임 ‘마인드런(Mind Run)’을 만들었다. ‘함께 달려요, 함께 치유해요(Running together, Healing together)’라는 구호를 만들고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매월 2회씩 모여서 공원을 달렸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면서도 러닝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춘 동료가 자진해서 코치를 맡아주었다. 밤샘 당직과 과중한 진료에 내몰려 운동, 영양, 휴식 어느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동료들이 용기를 내어 참여하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해본 적이 없다며 부끄러워하는 동료를 환대하고 안내해 주었다. 온라인에서도, 대면 모임에서도 모든 동료가 러닝 초보의 눈높이에 맞추어 공감과 지지로 격려해 주었다.



라이프스타일 정신의학


러닝이 계기가 되어 건강과 삶의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점차 관심이 확장되어 건강한 식사 습관을 실천하고, 수면과 휴식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됐다.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의 효과를 체험하자 어느새 진료할 때 우울과 불안에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약물치료와 더불어 삶에 있어서 효과적인 개선책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미국정신의학회는 2025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한 정기학술대회에서 ‘긍정적인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을 위한 라이프스타일(Lifestyle for Positive Mental and Physical Health)’을 주제로 삼아 정신의학 분야에서도 라이프스타일 개선에 주목해야 함을 널리 알렸다. 마인드런 활동에 참여한 의사들은 뜻을 모아 한국라이프스타일정신의학연구회를 창립하고 ‘라이프스타일 정신의학(Lifestyle Psychiatry)’ 교과서를 번역해서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은 질병에 대한 지식과 기술만이 아니다. 히포크라테스는 “모든 이에게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절한 영양과 운동을 제공한다면, 우리는 가장 안전한 건강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의사 자신이 건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의사가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가꾸어 나가면, 자연스레 환자를 진료할 때도 확신을 담아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도록 설득할 수 있다.


건강한 의사=건강한 환자


의과대학 시절, 나 역시 자신과 싸우며 지쳐 있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의대생 중 누군가도,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소속을 잃었다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함께 걸어주는, 함께 달려주는 동료가 있다면, 그 길은 생각보다 외롭지 않다. 의과대학 시절은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익히기에 매우 중요한 시기다. 의대생이 운동, 영양, 휴식, 스트레스 관리의 효과를 스스로 체험하면 환자를 질병만이 아니라, 건강한 부분을 가진 전체성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고, 질병 치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방에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의사로 성장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은 치료자를 ‘함께 체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치료자의 확신이다. 치료에 있어서 연구는 근거를 제공하고, 체험은 확신을 가져온다. 아파본 의사가 아픈 환자의 마음에 공감한다. 건강한 의사가 건강한 환자를 만든다.



마인드런 피어서포트


마인드런의 본질은 피어서포트(peer support) 프로그램이다. 참여한 모든 사람은 러닝을 통해 서로에 대한 배려, 따뜻한 이해와 공감을 나누며 몸의 건강, 마음의 건강, 사회적 건강을 실천하고 있다. 의사와 의대생, 환자와 시민이 다 함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며 달리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2025년 11월 16일에 하남시 미사경정공원에서 약 5천 명 규모의 마인드런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몸의 움직임, 달리기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모두가 하나되는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지치고 아파하는 동료를 챙기고자 한 작은 관심이 어느새 사람과 사람을 잇고, 큰 흐름이 되어 환자들과 사람들을 돕는 새로운 문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세상에는 의사가 필요하다. 의업은 고통받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다.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하고, 지쳐가는 동료에게 손을 내밀 때, 의술은 질병을 넘어 삶과 세상을 치유하게 된다.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마인드케어센터 MAGAZINE에 실린 글을 허락을 받아 옮겨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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