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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Sep 13. 2020

"내가 죽거든 동생들을 엄마처럼 보살피거라"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새로운 이야기

지금 살아계신다면 올해로 100살이 되는 엄마는 1921년 3월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셨습니다.


엄마는 18살 나이에 한 살 어린 17살 아버지와 혼인을 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아버지는 농업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엄마와 혼인 후에 농업중학교를 졸업을 하고 농협에 근무하였고 엄마는 20살딸을 낳았습니다.


스무 살에 큰 딸을 낳으셨으니 큰 언니는 올해로 80살입니다.


엄마의 학력은 무학입니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다섯째 언니가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는 학력은 고졸, 엄마의 학력은 국졸이라고 적어 놓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조금은 민망해하던 표정이 생각나지만 엄마 학력은 국민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한 무학이 맞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독선생을 모시고 언문 공부를 하셔서 글을 쓰거나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문 공부를 했기 때문에 엄마가 쓰는 글자에는 요즘 쓰지 않는 훈민정음에서나 볼 수 있는 받침 등이 있어서 해석이 필요했지만 말입니다.


엄마는 스무 살에 낳은 딸 밑으로 아이가 생기는 대로 계속 낳다 보니 열두 남매를 낳으셨습니다.


얼굴 한 번을 못 보고 혼인을 한 아버지와는 신혼시절에는 제법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던 것도 같습니다. 엄마는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다른 고장의 농협에 근무하느라 하숙 생활을 하면서 곧잘 엄마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거나 큰 딸의 옷도 사서 우편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엄마에게 온 편지를 할아버지께서 뜯어볼 때도 있었고, 할머니는 아버지가 보낸 손녀의 옷을 엄마에게 주지 않고 둘째 아들의 손자에게 주어서 입게 하기도 했답니다. 엄마는 딸아이가 입어야 할 옷을 사내아이가  입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기도 했답니다.


어찌 되었건 엄마와 아버지 사이가 내 기억 속에는 없지만 신혼 초기에는 '보고 싶은 당신...'하고 시작되는 연애편지를 쓰고 받을 만큼 달콤했던 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아버지는 엄마에게 학교도 못 다녀서  못 배우고 무식하다는 말을 우리 앞에서도 내뱉을 만큼 엄마를 함부로 대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서 친정집에서  누구보다 귀하게 자랐기에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았던 엄마에게 아버지의 못 배워서 무식하다는 말은 마음의 커다란 상처가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엄마는 아버지로부터 무시당하던 그때부터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아로새겼습니다. 그 덕분에 큰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100여 리 떨어진 전주에 있는 성심여자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언니가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던 어느 날, 엄마는 큰언니에게 대학교에 진학하라고 하더랍니다. 1950년대 그때 당시 딸들은 물론이고 아들도 국민학교조차 보내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언니는 자신이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 이미 감사하다고 생각을 했고 대학교에 진학할 거라고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언니에게 대학교에 진학하라는 엄마의 말은 언니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시절 언니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전주에서  내놓으라 하는 부잣집 딸들도 여럿 있었는데 그 동창들 중에도 대학교 진학을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언니는 "엄마 우리 집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동생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대학교를 가. 그냥 고등학교만 졸업을 해도 감사해요."


"내가 너희 아버지를 믿을 수 없어서 그런다. 너희 아버지가 입만 열면 아들 딸 국민학교만 졸업시키고 아들들은 머슴살이를 보내고 딸들은 식모살이 보내라고 말을 하는데, 내가  저 어린것들을 두고 언제 어떻게 잘못될지 모르지 않느냐? 내가 죽기라도 하면 네 동생들 모두 너희 아버지가 머슴살이 보내고 식모살이 보낼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혹시 내가 죽기라도 하면  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면  내 대신 동생들을 엄마처럼 보살피고 학교도 보내도록 하거라."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었던 1960년 엄마가 큰언니를 대학교에 보낸 일련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 2월 17일,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큰언니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거든 혹시 엄마가 없을 때 동생들을 엄마 대신 보살피라는 말을 듣고 큰언니는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엄마 그럼 내가 사범대학교 수학과를 갈게. 사범대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잖아."


"아니다. 사범대학교 말고 약대에 가서 약사가 되거라."


"엄마, 갑자기 약대는 왜?"하고 묻는 언니에게 엄마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 고향 전라북도 오수는 교통환경이 좋아서 5일,  10일, 15일 등 5일마다 장날이 되면 북으로는 임실 전주, 남으로는 사매 남원, 동으로는 지사 산서, 서로는 삼계 순창  동서남북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수 모여들었습니다.


어느 오수 장날, 오수하나밖에 없는 약국(노성 약국) 앞에 많은 사람들이 약을 사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엄마의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시절 병원도 많지 않았지만 몸이 아프다 쉽게 병원에 가기 어려웠던 까닭에 가정상비약 등 여러 가지 약들을 사기 위해서 오수 장날이면 약국은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풍경이 엄마의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사람이 많은 오수 장날을 피해서 시간을 내어 일부러 약국을 찾아갔답니다. 그리고 약사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내 딸이 지금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는데, 약사님처럼 약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그때 약사 먼저 대학교를 진학할 때 약학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약사 자격시험에 합격을 해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 뒤로 엄마는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던 큰언니가 사범대학교에 가겠다고 했지만 기어코 약대에 진학해야 한다고 주장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와 언니는 가까운 대학에 약학대학이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전라북도 소재의 대학에는 약학대학이 없더랍니다.


결국 찾아낸 곳이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에 약학대학이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1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다고 합니다.


큰언니는 엄마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다음 해에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을 했고, 조선대학교 약학대학 2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큰언니가 약학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사방으로 알아보던 때에는 내 위의 막내 오빠와 나, 그리고 내 동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78세 까지 54년 동안 약국을 운영한 큰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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