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주에 달하는 일 년 치 연차를 몰아서 쓰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이었던 휴직은 사실 퇴사를 염두한 즉흥적이고 소극적인 중년의 일탈과도 같았다.
크고 안정된 크루즈를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조그만 보트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단은 쉬자,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은 일 년 뒤에.
쉬면서도 자존감의 붕괴는 쉬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내린 결정이 누군가의 큰 그림에서 미리 설계된 시나리오였다면?
타살 같은 자살이라고 할까.
계획했던 박사과정 재입학도 등록금을 납부하는 시기가 다가오니
원래의 다부졌던 의지도 어느새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변해버렸다.
앞으로 4~5년... 얼추 2000여만 원... 노 수입... 다시 공부...
모든 것이 부정적 암시가 되었다.
급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취업사이트를 헤매고 있는 나.
이직?
지금의 조직과 비슷하면서 규모만 작은 곳에서 지금까지 했던 고생을 리바이벌하려고?
여기는 내 기반과 인맥이라도 있지, 어딜 가도 그곳의 텃새와 경계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
아니 쉰다며!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뭐냐!!!
다시 일할 거면 그냥 돌아가던가!
" 사장님, 사람 안 뽑나요? 저 FA로 나왔어요. 데리고 가주세요 ㅋㅋㅋ "
나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그래야 무너진 자존감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았다.
알고 지내던 컨설팅 대표를 한번 쓱 떠봤다.
" 나야 좋지... 근데 여기 애들이 다 어린데 괜찮겠어? "
" 저도 어려요~~~ "
" ㅋㅋㅋㅋ"
그리곤 문자가 없다.
문자가 없다.
그 뒤로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 대표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 00일 00에서 보자 "
왜지? 대놓고 거절하기 뭣하니 술이라도 사주려고?
겉으론 의연했지만 내심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었다.
그날은 평소 입지도 않던 비즈니스 캐주얼로 착장하고 화장도 공들여했다.
" 그래서 우리 회사는 지금 좀 어렵고, 대신에 우리 파트너사가 있는데 거기에 네가 갔으면 좋겠어.
우리 일을 거기랑 같이 하는데 이쪽 일을 하는 사람이 없거든 "
아 완곡한 거절이구나...
굳이 이직할 생각도 없었지만 또 한 번의 'No'는 나를 더욱더 작게 만들었다.
하지만 난 더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했다...
거나하게 취하고 돌아서 헤어지는데,
"00아, 잠깐만! 아까 얘기했던 그 회사 대표가 지금 이리로 온데 너 보러"
으응? 갑자기?
근데 뭐지, 이 묘한 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