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일촌은 누구인가?

일촌, 리셋하기

by Leo
1,000명의 연락처


휴대폰 연락처를 무심코 스크롤하다 보면 낯선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분이 누구시더라?’ 20년간 여러 회사를 다니며, 인연을 맺으며 명함을 주고받다 보니 그중 어디선가 만나고 교류했던 분일 텐데, 기억력이 떨어진 탓인지 가물가물한 경우가 많다. 카톡에 뜨는 이름들도 프로필 사진을 재차 확인하지 않으면 착각하거나 기억이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먼지 쌓인 친구 리스트가 많다.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굳이 누군가와 통화나 메신저를 주고받지 않은 편이고, 혼자서도 이것저것 잘 지내는 타입이라, 이렇게 1,000명이 넘는 연락처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이들 중 내가 남은 인생동안 가끔이라도 만나며 지낼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한 때는 모두 소중한 인연이었을 텐데 말이다.


어느 하루는 내가 최근 2~3년 동안 일과 관련 없이, 개인적으로 한 번이라도 만나거나 교류한 적 있는 사람들을 모임별로, 관계별로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본 적이 있다. 오랜 죽마고우에서부터, 중/고/대학 동창들,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전 직장 동료들, 함께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클럽 사람들, 함께 있으면 좋은 지인들 등등을 빼곡히 이름을 떠올리며 나열해 보니, 얼추 100명 남짓 되었다.


헉! 100명이나! 안식년 기간 동안에는 가족을 제외하면 한 두 명과의 통화도 흔치 않은 일상이라 내겐 분명 넘치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그래봤자 내가 먼저 연락하거나 친밀한 통화라도 하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럼에도 한 명 한 명 이름을 적을 때마다 내게 가끔은 위로가 되고, 때로는 힘이 되고, 기쁨이 되어주는 이름들이라 감사함이 느껴진다.


나는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내는 편이다. 하루 종일 휴대폰 벨이 울리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다. 오히려 그 시간에 에너지를 나 자신에게 쏟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울 때가 더 많다. 그런데도 가끔 사람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신기하게도 에너지가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들이다.


한 테이블 모임


나도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 단, 조건이 있다. 보통 한 테이블을 넘지 않는 모임을 좋아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온전히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왁자지껄한 단체 모임은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가끔씩 만나는 4인 규모의 몇몇 좋아하는 모임이 있다. 그들은 각각 개성이 뚜렷한 편이고, 그럼에도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준다.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서로에게 귀 기울여주고, 대화 속에 적절한 여백을 만들어 다른 이의 의견을 기다려주는 모습도 좋은 점이다. 이런 만남은 끝나고 나서 집으로 향할 때 마음에 충만함을 남긴다.


계절이 바뀔 때쯤, 이렇게 한 테이블 모임들이 간간히 기다려진다. SNS를 통해 지인들의 근황을 알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필터링된 삶의 일부일 뿐. 대화를 통해 서로의 빙산 아래에 숨겨진 생각과 감정을 금을 캐듯이 발견하는 대화가 좋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의 내면을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엿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정리가 필요해

나이테처럼 누적된 연락처의 인연들 사이에서 관계의 구분과 원칙을 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카톡 화면에서 매일매일 알려주는 ‘생일인 친구’ 리스트와 가끔씩 울리는 단톡방에서 보내오는 경조사 소식. 모르는 친구는 아닌데, 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관계들, 어느 선까지 위로와 봉투를 보내야 하는지 모를 모호한 관계의 경계선. 어디까지를 1촌으로 할지 고민하다 보면, 1 촌보다 앞선 0촌까지 생길 판이다.


원칙을 정하기로 했지만, 쉽지 않다. 그동안 세상을 살아온 감각을 활용하되, 남들의 시선보다 내 진심에 솔직해지는 게 내가 찾은 답이다. 사회과학적으로도 한 개인이 챙길 수 있는 사회 공동체의 규모는 한정된다고 하니, 못 챙긴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못 받았다고 섭섭함을 가질 필요도 없다. 딱 거기까지이다.


내 안으로 향하는 에너지


관계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은 단순히 연락처를 분류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아니다. 이는 나의 삶과 에너지를 돌아보고,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한 과정이다.


줄어드는 인간관계를 상실감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관계를 정리하고, 내가 진정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나머지 시간을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기회이다. 그렇게 새로운 후반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현명한 방법이자,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가 무엇인지, 그들과 어떤 가치를 공유하고 싶은지 선택할 시기이다.


관계를 정리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결코 냉정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인생의 진짜 성공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라고 한다. 대신, 가장 소중한 가까운 사람과 시간과 감정을 나누는 것, 소수의 진정한 관계를 통해 더 큰 행복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니 말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