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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09. 2016

새로운 시선

세상이 보여줄 것은 여전히 많다


이러다 새해에 딱 맞춰서 태어나는 거 아냐?


형부와 농담처럼 주고받은 말이 현실이 됐다. 2월 8일 새해. 첫 조카가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일주일 정도 빠른 소식이었다. 온 가족이 병실 앞에 모여 간호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5분이 5시간처럼 느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설렘이 점차 걱정으로 바뀌어가던 그때, 간호사가 아기를 품에 꼭 안은 채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포대기 사이로 빼꼼히 내민 얼굴, 슬며시 뜬 두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펑펑 쏟아져나왔다. 아유, 아가씨. 왜 눈물을 흘리고 그래요. 간호사의 말에도 도저히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게요. 이렇게 기쁜 날에 웃어야 하는데. 처음 느껴보는 감정,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라 나 자신조차 얼떨떨했다. 병실 앞에 서 있던 모두가 몽땅 전염이라도 된 듯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세상의 선물로 온통 눈물바다가 된 채 새해를 맞이했다.


보호자 1명 외에는 출입을 삼가 달라는 말에 다른 가족들은 다시 한 번 새해 인사를 나눈 후, 미소를 머금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오랜만에 서울에 온 아빠와 몇몇 물건들을 챙기러 언니 집으로 향했다. 명절이라 그런지 지하철 안은 무척 한산했다. 언니 어릴 때를 아주 쏙 빼닮았어. 요기 입이랑 코 좀 봐. 눈은 형부를 닮은 것 같지?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같은 사진을 보고 또 봤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매일매일 본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눈가의 작은 주름 하나, 옆머리에 있는 한 두 가닥의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외할아버지가 된 나의 아빠는 갓 태어난 조카를 보자마자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살아있어서 참 기쁘다-라고. 나는 자꾸만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아 아빠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장소가 바로 이곳, 병원이었건만.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요. 회복될 때까지 꼭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2달 전, 브레이크 없이 달리기만 했던 아빠에게 처음으로 경고장이 날아왔다. 한 번 무언가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몸 생각은 저만치 미뤄두는 아빠의 오랜 버릇 탓이었다. 그래도 꾸준히 운동을 하신 덕에 이 정도인 거예요, 주치의는 다시 한 번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해본 적 없던 아빠인데. 환자복을 입은 모습을 마주하는 것조차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왜였을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아빠만은 왜 항상 건강할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걸까. 다행히 하루하루 다시 건강을 회복했지만 그동안엔 없었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평소에도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빠와 나지만, 그날 이후 자그마한 변화가 찾아왔다. 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물론, 그때 그때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 자연스러워진 것 같았다.


"아빠. 저 애기 태어날 때도 온 가족이 조마조마 했겠지? 이상하다. 오늘 따라 애기들이 왜 이렇게 많이 보이지."


한참 조카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우린 신사역에서 5-6살 된 여자 아이를 보게 되었다. 뽈뽈뽈 엄마 뒤에 꼭 붙어 지하철에 올라탄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지었다.


"그럼. 너희 셋 다 그랬지. 조카 태어나니까 애기들부터 눈에 들어오지? 조금 더 자라면 그 또래 아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거야. 전에는 관심 없던 것들도 한참 들여다보게 될 거고. 세상이란 게 참 신기해. 조금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 온통 그걸로 가득한 것 같으니 말이야."


아빠가 퇴원하는 날, 세상의 빛이 달라진 걸 처음 느꼈고, 조카가 태어난 오늘, 세상에 이렇게 이토록 많은 아기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병원이라는 한 공간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감정들- 나는 마음속 어딘가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놀랄 일이 뭐 있겠냐고, 이제 제법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았냐고, 앞으로 겪게 될 미래의 일들을 지레짐작해버리던 때가 우습게 느껴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한 생명으로 인해 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것이, 지난 1달 간의 가슴 시린 경험이 아빠와 나를 더욱 단단하게 엮어준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두리번두리번 세상 구경을 했다. 시장 사이를 정신없이 뛰노는 아이들도 보았다가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거리 한편에서 바둑을 두시는 어르신들도 봤다가 어딘가 달라진 것 같은 풍경들을 아빠와 한참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내게 앞으로도 보여줄 게 참 많다고, 그 순간순간들을 부디 놓치지 말아달라고, 종일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오늘 느낀 이 따스한 감정, 손으로 전해지는 이 뜨거운 온도를 앞으로도 몇 번이고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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