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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윤슬 May 23. 2022

부모님의 제주 여행에 드린 오천만 원

: 부모님의 순수한 다정함을 늘 응원하고 싶은 작고 소중한 마음

엄마가 건네준 50000원의 의미

나를 알지 못해 방황했던 날들,

내가 노력한다고 달라지지 않았던 회사의 관계에 지쳐 퇴사를 했을 때 툭하면 우울함이 찾아와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난 걸까?' 늘 자책만 하며 나를 몰아세우는 날들이 많았다. 돌이켜 보면 20대의 시간은 나를 잘 알지 못했기에 더욱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해야 강점이 발휘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돈을 벌기 위해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당연했을 일이다


"엄마 나 제주도에 다녀올게"

힘든 시간이 찾아올 때마다 도저히 이곳에서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홀로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표면적으로는 '비행기 특가로 표가 싸더라'가 이유였지만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을 때가 있었다. 내 못난 모습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다 잘될 거야'라고 이야기해주는 친구들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이력서를 넣고 잠들어도 면접 전화가 오지 않는 아침이 오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흐려졌으니까, 그저 나는 제주 바다를 보며 내 마음을 훌훌 털어 버리고 싶었다


그날도 아침 비행기를 타야 해서 엄마가 공항버스를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셨다. 짐을 내리고 '엄마 잘 다녀올게요!' 인사를 하는데 엄마는 내게 오만 원권 한 장을 건네셨다. '밥 잘 챙기고 조심히 다녀와' 엄마 차가 떠나고 울컥 눈물이 났다


세 자매 중에 둘째로 태어난 나는, 언니보다 훨씬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왔다. 첫째인 언니는 부모님의 선택이 많이 개입되었는데 둘째인 나는 부모님의 의견보다 내 의견으로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늘 책임감을 가져야 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했고 내가 선택한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오랜 공백기 끝에 입사했던 대학병원 비서로 일하다 퇴사했을 때도 엄마에게 깊은 사정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엄마 눈에는 그저 좋아 보이는 회사를 내발로 차고 나온 걸로 보였을 테지만 이유를 따져 묻지 않으셨고, 그저 이유가 있었겠거니 생각해주셨을 테니까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딸이 다시 취업을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을 때 엄마는 아마도 알아서 잘 해내리라 믿고 기다려주셨던 거겠지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면 엄마의 기다림과 다정함이 참 감사하다. 늘 조급한 나는, 내 자녀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 줄 수 있으려나.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엄마에게 받은 다정한 마음을 떠올리며 모든 선택을 응원해 주고 싶다


부모님의 제주 여행에 건넨 오천만 원


부모님의 신혼여행지가 제주도였다고 한다

그 당시 신혼여행지에서 찍은 빨간 한복을 입은 엄마와 정장을 멋지게 입은 아빠의 사진만 본 적이 있다. 조금 늦은 나이에 만나 결혼을 하신 두 분, 어떤 날은 가장 친한 친구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세상 원수가 따로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 두 분이 식탁에 앉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세월의 힘을 느끼곤 한다


몇 년 전, 우연히 다섯 가족이 제주 여행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우연히 모두가 모인 여행인지라 마음이 든든했다, 내가 좋아하는 곳들과 좋아하는 제주 고등어회를 가족들과 함께 먹을 수 있어서 마음이 다정해졌던 시간이었다


가족 여행 이후로 두 분이 오랜만에 제주도에 가신다

친구분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에 정신없을 거 같다며 분주해하시더니 짐을 싸는 모습을 보면 소년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옷을 입을지 모른다며 옷을 차곡차곡 쌓아서 캐리어에 담는 엄마와 신발은 하나 더 챙겨야 하는 거 아니냐며 신발장과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하던 아빠의 순수한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버렸다



언니에게 부모님 여행에 용돈을 드리고 싶다고 하니 오천만 원 봉투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떻냐고 한다. '오! 이런 게 있구나, 아이디어 좋다' 동생과 차근차근 오천만 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폐를 하나하나 붙여 봉투를 칼로 잘라냈다


삐뚤빼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설픈 봉투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작은 편지지에 '싸우지 마시고 즐겁게 다녀오셔요'라는 내용으로 편지도 썼고, 새벽부터 출발하시는 부모님에게 깜짝 선물로 드리려고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잠이 들었는데 오천만 원을 보고 좋아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니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함께해주세요


기억은 기록하지 않으면 스쳐지나 다고 생각한다

사실 오래전 기억도 잘 떠올리는 편이라 내게 인상 깊었던 사건들은 10년, 20년 전이라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소한 행복들을 기록하지 않으면 어느새 물 흐르듯 흘러가 버려 어떤 색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게 기록의 힘은 여전히 다정하다. 힘든 시간을 기록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픈 시간을 기록하기도 하고, 행복한 일을 기록하기도 한다. 내게 기록은 울고, 웃었던 내 삶의 전부니까. 여전히 기록할 수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




부모님에 대한 기록은 더욱더 마음이 다정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순수해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일상의 다정함을 배우곤 한다. 얼마 전 아빠가 뇌졸중 수술을 하시면서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던 때가 있었다


평생 건강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이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 '제주도는 어때?'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본다. '날씨가 너무 좋고 맛있는 것도 엄청 먹었어~ 근데 하루 종일 걷느라 좀 힘드네. 역시 여행은 젊었을 때 많이 다녀야 돼!' 여행을 떠난 엄마와 여행으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오늘이 좋다


부모님의 순수한 시간을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다

늘 다음으로 미루기에는 우리의 시간은 짧기에  '다음에, 시간 될 때'라는 마음보다 '오늘,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라는 마음을 안고 부모님과 함께 길을 걷자며 다짐해본다


부모님의 제주 여행이 끝나면, 우리 가족의 여행을 계획해 봐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우리 가족의 시끌벅적한 여행은, 먼 훗날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의 행복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 우리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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