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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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인터뷰 당일. 나는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 인터뷰를 잘 준비해서도, 경험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설명하기 힘든 일종의 평안함이 있었다. 어차피 인연이 아니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전날까지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은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비워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아는 건 아는 대로, 모르는 건 최선을 다해 답하자.”
그리고 마음으로 빌었다. 인터뷰 후 후회만은 남지 않게 해달라고.
A, B, C. 세 명의 인터뷰어를 연달아 만났다. 모두와 간접적인 인연이 있었지만, 애초 다짐대로 인터뷰 중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말미에만 살짝 언급했다. “사실은 당신을 짧게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GPU 연구를 시작할 때 읽었던 논문이 바로 당신의 논문입니다.” A는 반색하며 웃었고, C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인 인연에 기대려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나의 간접 네트워크를 살리는 신의 한 수였다.
A와 B의 인터뷰는 무난했다. 그들은 내 지식과 경험의 범위 안에서 질문을 던졌고, 추상화 수준(abstraction level)도 높았다. 디렉터급 고경력자답게 디테일보다는 큰 그림 중심이었다. 간혹 모르는 영역이 나와도 유사 경험을 엮어 자연스럽게 대응할 수 있었다. 세션이 끝날 즈음엔 오히려 나도 모르게 상기돼 있었다. 막힘 없이 ‘무난’했고, A는 자신이 던진 함정 질문을 깔끔히 피한 나를 칭찬하기도 했다. 비워두었던 마음에 기대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마지막 인터뷰어 C를 만났다. NVIDIA 초창기 멤버이자 셋 중 가장 경력이 긴 엔지니어였다. 그의 질문도 A, B와 비슷하게 ‘천상계’에 머물 거라 생각했다. 환한 웃음과 함께 등장한 인상 좋은 노년의 엔지니어는 내 과거 프로젝트에 호기심을 보였다. 고맙다. 내 과거를 물어봐주어. 내 이력에 대한 질문만큼 답하기 쉬운 것이 있을까. 이런 질문은 주도권을 인터뷰어에게 쥐어주는 것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분야고, 인터뷰어는 잘 모르는 분야니까. 신나게 대답했다.
내 첫 대답이 끝나자, 그는 질문지를 펼치며 분위기를 단숨에 바꿨다. 본게임의 시작이었다. 그가 준비한 질문은 총 5개. 단계별로 난이도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천상계에만 머무실 줄 알았던 C는 연옥과 지옥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만렙 레이드 보스였다. 그의 질문은 어느 하나도 뭉뚱그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첫 번째 문제에서 나는 그대로 무너졌다.
A와 B의 퀘스트처럼 무난할 거라 방심했던 나는, 질문의 의도와 맥락을 놓쳤다. 난이도 순이라 가장 쉬운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을 실제로 활용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종이에 메모를 하며 천천히 답을 끌어내려했지만, 고개를 숙이는 순간 줌 화면 너머의 아이컨택은 끊어졌다. 말은 꼬였고, 논리는 흐트러졌다. C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 표정이 실망인지, 의아함인지 알 수 없었지만, 첫 타에서 점수를 잃었다는 건 분명했다.
10분 가까이 허우적대던 나를 보고, 결국 그는 정답을 알려주었다. 답을 들었을 때, 나는 허탈했다.
‘이런, 그 쉬운 걸…’
눈앞의 넓은 길을 두고 쓸데없이 좁고 험한 길로 들어간 꼴이었다. 어렵게 생각하다 스스로 자충수에 빠졌던 것이다.
"망했다"
이전 세션을 마치고 가졌던 기대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든 질문을 일사천리로 돌파해도 될까 말까 한 인터뷰.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놓쳤으니, 역전은 불가능해 보였다. 순간 마음속이 차갑게 체념으로 가득 찼다. 오늘 난 침대에서 이불킥을 대차게 찰 것이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후회로 밤을 지새우겠지.
'아, 망했네요. 결과는 안 봐도 뻔하겠죠? 죄송합니다. 인터뷰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 라며 자리를 일어설 수는 없었기에, 멋쩍게 웃었다. '제가 어렵게 생각했군요'
인터뷰는 끝나지 않았고 그다음 질문을 받아야 했다. 첫 번째 문제를 놓친 나는 속으로는 여전히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질문을 거치며 나는 나도 모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어찌어찌 그 단계별 퀘스트를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아키텍처, 때로는 알고리즘, 때로는 그래픽스. 종잡을 수 없는 관문들을 통과하면서 나는 C와 다시 조금씩 소통하기 시작했다. 한번 대차게 넘어졌다가, 쩔뚝거리며 일어선뒤, 조금씩 걸음을 옮긴 셈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C의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전. 가장 난도 높은 마지막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ps. 얼마 만에 글인지. #3을 기다리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심지어 이번 편에도 완결하지 못하고 글이 계속 늘어지는군요. 대신 완결 편 #4는 빠른 시일(1주일 내)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