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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Sep 17. 2020

왜 매니저는 나를 관리해주지 않는 거야

관리받는 것의 안락함


인사가 만사(人事萬事)라고 합니다. 좋은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하는 것이 으뜸이라는 말이죠. 대기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뽑은 인재들이 과연 일을 잘하고 있는지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실로 '관리가 만사(管理萬事)'인 셈입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이 '관리'라는 것을 잘하라고 별도의 보직을 만들었습니다. '관리자(管理者)'. 유능한 관리자의 덕목은 자신이 맡은 조직원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성과 관리, 근태 관리 심지어 멘털 관리까지.


과거에는 구두나 문서에 의존했지만, 이제는 IT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보다 체계적으로 임직원들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퇴근, 야근, 주말근무, 연간 휴가, 출장, 결재 등 회사 내에서 임직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데이터로 기록됩니다. 더 이상 관리자는 팀원들이 자리에 앉아서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관찰할 필요가 없죠. 대신 시스템이 차곡차곡 데이터를 모아줍니다.


축적된 데이터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합니다. 의무 근로시간을 준수했는지, 법정 근로시간을 초과했는지를 확인하여 근태를 체크하거나 분쟁의 여지를 미연에 차단할 수 있죠. 이를 조금 응용하면 임직원별, 부서별 야근 랭킹을 뽑을 수도 있습니다. 야근, 특근이 많은 Top 3 직원에게는 힐링캠프가, 부서엔 격려가 돌아갑니다. 추상적인 개념인 '성실함'을 '물리적인 근무시간'으로 계량화해 낼 수가 있는 것이죠. 어떤 나라에서도 해내지 못한 한국 데이터 과학의 힘입니다.


데이터로 임직원을 통제하던 기업들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코비드 19로 재택근무가 반강제화되었기 때문이죠. 외국에서나 하던 재택근무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원, 대리급 직원은 반색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데이터를 무기로 직원을 관리하던 '관리자'에게 이는 자칫 통제권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관리에 창의적인 발상을 더합니다. IT 기술이 이에 날개를 달아주죠. 메신저는 부서원들의 아침 출근을 도장을 받는데 아주 효과적이고, 화상회의 솔루션은 불시에 온라인으로 부서원을 소집하는데 그만입니다  고성능 보안 프로그램이 직원의 컴퓨터에서 마우스나, 키보드의 입력이 있는지 15분마다 검사해줍니다. 근무지 이탈을 확인하는데 이만한 방법이 없죠. 원격 근무로 인한 근태 불량 따윈 IT 강국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직원들은 기분이 영 좋지 않습니다. 감시받는 기분이 드니까요. 하지만 그런 기분을 잠시 내려놓으면 이만큼 일하는데 편한 방법도 없습니다. 일분일초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안내해 주죠.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조금은 성가시긴 해도 그저 관리자가, 시스템이 만들어준 규칙을 잘 따르기만 하면 골치 아픈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죠. 책임? 그 무거운 걸 질 필요도 없습니다.


친절한 관리자는 오탈자도 잡아준다. 이미지 출처: https://scottberkun.com


이렇게 10년 이상 관리당하는 것의 안락함을 느끼고 있던 저는 미국 회사로 이직한 뒤 문화충격에 빠졌습니다. 도처에 존재하는 그 불합리함이란 실로 경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첫 출근을 한 날, 저는 슬기로운 회사생활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했고 그래서 매니저에게 물었습니다. 


"출퇴근 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매니저는 저를 외계인 쳐다보듯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난, 네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야. 널 코치하는 사람이지"


'응?'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런. 그럼 누가 나를 관리해주는 거야? 매니저라는 사람이 팀원 매니지를 안 하고 무슨 월급을 받는다는 말이야. 나는 어떻게 일을 하라고?' 


당장 회사 인트라넷에 접속했죠. 혹시나, 대신 이를 관리해 주는 시스템이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요. 경력자가 이직 후 해야 할 일순위는 새로운 직장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자. 일목요연하게 보여달라고. 내 근태 현황을. 출퇴근 시간은 어디서 볼 수 있어? 휴가는 어디다 올리면 돼? 휴가는 매니저한테 결재받으면 되는 거야?'


인트라넷을 몇 시간을 뒤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휴가 관리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저는 결국 HR에 문의를 했습니다.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연 휴가일수의 가이드라인은 있는데 우리는 그걸 추적하지는 않아.
네가 알아서 일정에 반영하고 팀원들하고 공유해라."


이런. HR은 게으르기 짝이 없는 조직이었습니다. 임직원의 휴가를 관리해주지 않고 그 책임을 임직원에게 미루고 있었던 것이죠. 휴가를 어찌 결재도 안 받고 간단 말입니까. 말이 안 됩니다. 미국이라고 다 선진화된 시스템을 갖춘 건 아니었습니다. 당장 이곳도 한국 기업의 솔루션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래서는 체계적 업무 진행이 안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이직 후 첫 회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옷도 깔끔하게 입고, 평소 안 하던 머리에 왁스질도 하고 출근했습니다. 회의실에 다 함께 모일 테니 말이죠.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회의시간이 다 돼도 팀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일정에 회의시간만 있었고 장소는 공지가 되어 있지 않았더군요. 어. 그런데 시간이 되자 하나 둘 팀원들은 자리에 있는 헤드셋을 머리에 끼고 온라인에 접속했습니다. 아차.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저도 부랴부랴 남는 헤드셋을 구해 같은 링크에 접속했죠.


알고 보니 모든 회의는 온라인으로 한다고 합니다. 집이 먼 사람은 집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온라인이 편리하다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지만 이내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일을 한다고? 매니저는 팀원이 집에서 일을 하는지 놀고 있는지 신경도 안 쓰는 거야? 관찰당하지 않으면 직원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참 후진적인 관리방식이었습니다.



코비드 19가 창궐하고 회사는 전면 재택근무를 도입했습니다. 그나마 출근하던 때는 매니저에게 얼굴도장을 찍으며 업무에 대한 열정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재택근무 안 하고 회사에 나와 일하고 있어!'라고 어필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매니저는 제 일하는 모습 따윈 관심도 없어 보였습니다. 매우 불합리했습니다. 


관리되지 않는 재택근무의 폐해. 이미지 출처: https://au.finance.yahoo.com/


출근할 때는 그나마 사무실 건물의 지붕 아래서 약간이나마 관리받는 느낌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매일매일 집에서 일하는 이 시스템은 불안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빨리 코비드 19가 종식되어 다시 관리의 안락함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매니저는 저를 관리해주지 않는 것일까요?



- 예나빠


ps.


<실리콘밸리 회사들은 직원의 근태관리는 어떻게 하는가요?> 

자율에 맞기는 편이다. 성과에 대한 평가를 일하는 '과정'보다 '결과'로만 보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그래서 일하는 시간이나 장소에 대한 제한을 크게 두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은 비교적 자유롭고, 본문에도 썼지만 근무시간을 정량화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재택근무가 생활화되어 있어 사무실외 장소에서 근무한 시간을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회사 입출문 시 사원증을 시스템에 체크하는 것은 보안의 목적이지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기 위함도 아니다. 

유급 휴가(PTO, Paid Time Off)는 회사 정책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1년에 XX일과 같은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다. 휴가를 쓰기 위해 상사에게 결재를 상신할 필요도 없고, 사용한 또는 남은 휴가일수를 추적하는 시스템도 없다. 휴가를 계획 중이면 팀 일정에 반영해서 부서원들과 공유하는 정도가 휴가를 쓰기 위해 하는 통상의 절차다. 유연한 재택근무, 휴가제도를 활용하면 이런 조합도 가능하다. 2주 휴가 + 2주 원격근무로 한국을 1개월 정도 일정으로 다녀올 수도 있다. 물론 매니저와 사전협의는 필요하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경험상 휴가 일수는 한국 대기업보다는 적은 편인 것 같다. 그런데, 실리콘밸리 Tech회사가 갖는 고유의 장점 중 하나는 일정 근속연수를 채우면 안식월(sabbatical)와 같은 장기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 5년 근속 시 1개월). 안식월에 가족 여행 등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또한, 자녀 출산 시 육아 휴직(예. 남자의 경우 2개월) 정책도 잘 발달되어 있고, 아무런 제한 없이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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