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천 리 달려와준 사람을 위해, 나도 언제든 기꺼이 그 천 리를
Ep. 4
나의 인간관계를 돌아보면 당연하게도 (어쩌면 의아하게도) 학부 때 친했던 친구들과는 취업을 하게 되며 멀어졌고, 취업을 하며 친해졌던 동기들과는 이직을 하며 멀어졌다. 나의 신앙적인 상태와 관계없이 가장 가까이서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했던 사람들과는 가끔은 지역의 변화가 생기며 멀어지기도 했고, 그 시절의 간이고 쓸개를 떼주었다고 비유할 수도 있을 만큼 진심으로 함께 산을 넘기 위해 도움을 건네면 정작 그 인생의 고비를 넘은 후 멀어지기도 했다.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가장 친하다는 카테고리에 저장해 두었던 사람들은 대체로 그 시기에 어울렸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어떤 시기에 만났더라도 잘 지냈을 고르고 고른 소중한 사람들 이어서였다. 우리의 진심이 고작 어떤 물리적인 경계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할 때, 이러한 상처가 겹겹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나이 들면서 쌓이는 인간관계의 밀도가 아닌 나이 들면서 오는 골다공증 같이 뼈에 구멍이 잔뜩 뚫린 채 낙엽으로 툭 쳐도 부러질 것 같은 공허함만 쌓여갔다. 전화번호부의 여러 명의 친구보다 소수이지만 정말 가까운 몇몇의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믿음이 잇몸 뿌리까지 녹아내려 없어져 버리게 된 근 몇 년이었다.
그런데 나의 인간관계를 돌아보면 의아하게도 (그리고 당연하지 않게도) 내가 가장 깊고도 깊은 구렁텅이와 초라하기도 초라한 헝겊을 겨우 뒤집어쓰고 있을 때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 또한 위 고르고 고른 소수의 인연이 아닌 특별히 친하지도 특별히 안 친하지도 않았던 인연으로부터 왔다. 초중고 시절 12년 내내 알고는 지냈지만 개인적으로 학교 밖에서 만나 떡볶이 한 번 같이 먹으러 간 적 없는 친구가 자기가 사는 곳에 출장을 왔단 걸 우연히 듣고선 너무도 반갑게 만나자며 먼저 연락을 해오고 (정작 나는 그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도 연락할 생각을 못했는데), 그 친구와 헤어지기 전 기념품 가게에 들러 선물할 것들을 고르다 마음에 들었던 자수 가방 하나를 내가 들고 고민하다 다시 내려놓는걸 멀리서 봤는지 공항으로 가기 전 아까 내려놓았던 그 가방을 꺼내며 "네 거는 한 개도 안 사길래" 하며 건네주었다. 그 친구가 있는 도시로 가면서도 연락할 만큼 친하진 않다고 생각했던 나를 옆에서 관심 있게 살피고 챙겨주던 친구가 몇 년이 지나 도쿄로 석사를 하러 갔을 땐 이번엔 내가 그 친구에게 혹시 방문해도 되겠냐며 물었고, 그게 나의 첫 도쿄이자 그 이후로 여름마다 3년을 인생의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도쿄로 그 친구를 만나러 가게 되는 리추얼이 될 정도로 우리는 각별한 친구가 되었다. 서로 살고 있는 지역도, 서로 겪고 있는 인생의 단계도 중요하지 않고 한결같이 유지되는 다윗과 요나단 같은 우정은 내가 위에서 얘기했던 그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소수의 친구들이 아닌, 출장을 가면서도 특별히 연락할 생각을 안 했던 사람으로부터 오게 되는 한편으로는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신기한 인생의 배움이었다. 내가 구렁텅이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허우적대다 나중엔 점점 가라앉을 때 때로는 지켜보다 심폐소생술을, 때로는 지켜보다 가만히 그 진흙더미 속에서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은 내가 과거에 도왔던 친구들이 아니라 나는 특별히 베푼 적 없었던 사람들로부터 왔다. 다급할 때 그들은 나를 살리고, 어두울 때 그들은 나를 지켰다. 조건 없는 헌신이었다.
내가 방콕을 떠나기 전 내게 그 자수 가방을 쥐어줬던 친구는, 훗날 판단잎 재료를 사용해 디저트를 만들었다며 사진을 보내주곤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등학생 시절 판단잎을 활용해 디저트를 만들어서 학교에 들고 왔는데, 반 친구들이 전부 초록색 빵을 보고 흠칫하며 아무도 먹지 않았단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그날 반 친구들 중에서 자기의 판단잎 빵을 스스럼없이 먹었단다.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내가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데 이 사건에 대해 떠오르는 게 전혀 없었다. 입이 짧은 내가 나머지 반 친구들이 먹기 싫어한 것을 흔쾌히 먹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내 기억 속에는 벌써 오래전에 증발된 사건이었지만, 그 친구에게는 십 년이 지나서도 기억되는 고마움이었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위하고 섬겼던 관계들은 서로의 전화번호부에 남아 있는 게 무색할 만큼 멀어지기도 했는데, 나는 더 이상 기억도 하지 못하는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 인해 십 년이 지나 내 구렁텅이 속에서 함께 비를 막아주고 눈을 치워주는 관계도 있었다.
오늘 거의 삼 년 만에 석사를 같이 한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바로 옆나라 일본에 사는데도 졸업 후 각자 귀국하니 접점이 닿질 않아 딱 한 번 내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만나고 그 이후로 벌써 삼 년 간 간간히 명절 인사만 전하며 지내온 친구였다. 내가 좋아했던 친구지만 우리는 특별히 아주 많은 성향과 취미들이 겹치지도 않았고, 서로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도 못했고, 내가 아주 큰 도움을 준 적도 없어 긴밀하게 연락하며 지내는 친구는 아니었다. 서울을 방문한다는 말에 얼른 약속을 잡고 만났지만, 솔직히 한편으로는 그간의 달려온 삶의 코스가 너무 달라 이제는 좀 어색하기도,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그런데 밥을 반 공기즈음 비워가던 때 그 친구가 내게 그러는 것이다. 우리 석사 졸업할 때 즈음 다시 돌아간 일본에서 특수한 코로나 환경 때문에 제대로 정착도 못하고 조금 붕 떨어진 것만 같아 우울감이 점점 깊어졌는데 나와 메신저로 나눈 대화들이 자기가 낭떠러지로 추락하지 않도록 잡아주었다고 했다. 그때 내가 함께 해주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아마 우울증이 깊어졌을 거라고 했다. 그러며 헤어지기 전 별 건 아니라며 건네준 가방에는 내가 건넨 선물이 초라할 만큼 하나하나 나에 대한 애정으로 세심하고 섬세하게 고른 선물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사람 관계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에게 고마움을 느껴도 된다고 생각했던 내가 특별한 애정을 쏟았던 관계들은 물리적인 한계 앞에서 생각보다 쉽게 무너져 내리기도 했고, 나에게 고마움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관계들은 되려 나의 말과 행동이 본인의 삶에 어떠한 각인을 남겼다며 나를 두고두고 찾아주는 관계들이 되었다. 학부 시절 표현이 좀 거칠지만 나를 위해서 자기 팔도 잘라줄 수 있다고 했던 친구는 훗날 시차를 조정해 오랜만에 통화하는데도 중간중간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 점차 멀어지기도 했고, 학부 시절 가치관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친구는 정작 내가 별다른 맥락 없이 몇 년 만에 요즘 사실 많이 힘들다고 보낸 문자에 자기가 다 준비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짐가방만 챙기라며 샌프란행 항공편 스케줄을 바로 보내오기도 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아닌 게 사람 관계인가 보다. 내가 살린 사람들과 나를 살린 사람들이 대부분 일치하지 않음을 느끼며, 많은 걸 해주었지만 가장 필요할 때 보낸 안부 문자에 답장이 없었던 관계도 있는가 하면, 별로 해준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헤매고 있을 때 형제보다도 더, 가족보다도 더 나를 구하러 한걸음에 달려와준 관계도 있다. 생각해 보면 마음의 부채만큼 불명확한 부채가 있나 싶다. 그래도 나는, 나를 위해 천 리 달려와준 사람을 위해 나도 언제든 기꺼이 천 리를 달려가도록 이 마음의 빚을 잊지 않았으면 싶다. 그 마음의 부채를 잊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