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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막으면 기회가 온다

우리의 야구가 유한한 이야기에서 무한한 이야기로

by 일요일은 쉽니다


난 정말 야구가 끝나는 줄 알았다.

우리의 야구가 그렇게 끝이 나는 줄 알았다.



2024년을 기점으로 인생은 더욱 말이 안 되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2024년도에 펼쳐진 야구는 너무나 소중한 안식처였다.

한 주의 낙이자 루틴처럼 일요일 오후, 주 6일의 근무를 잠시 내려놓고 늦은 오후 버스 대여섯 정거장 지나면 나오는 공원에 도착해 옆문으로 들어서면 8시 방향에 우뚝 서있는 나무 그늘을 지나칠 때 이어폰 너머로 나오는 주제가의 전주만 들어도 미소가 새어 나올 정도로 2024년의 야구는 나에게 특별했다. 5월 스승의 날에 감독님이 내년에 보자고 하신 날부터 11월의 그 추운 날 패딩에 핫팩을 덕지덕지 붙여 마지막 직관을 함께한 날까지 정말 괴롭도록 끔찍했던 한 해를 야구를 보고 웃고 울며 버텼기에 여느 야구팬처럼 새 시즌이 지연되는 소식에 애가 탔다. 분명 하와이든 괌이든 어딘가 멋진 곳으로 떠났겠구나 하며 이제 딱 일 년 전 그 맘때 감독님의 “오라이” 한마디가 담겨있던 예고편을 보고 설레던 기억이 선명한데, 집에 TV가 없는 관계로 첫 방송을 보겠다고 하룻밤 지낼 짐을 들고 할머니네로 가 밤새 보고 자고 돌아올 만큼 일 년 전 야구가 시작했던 봄의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했는데,


일 년 후 야구는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한 주 한 주가 지날수록 팬들의 마음은 더 애간장이 탔을 것이다. 3월을 지나 4월을 지나갈 때는 점점 살짝 짜증이 섞인 반응들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첫 직관 소식을 듣고 영 이런 것에는 소질이 없어 취소표라도 잡고 고척에 도착했을 때, 그날 왔던 팬들은 다 그랬겠지만 겨울방학 OST가 나올 때 눈물이 맺히고 살짝 변형된 예고편 영상으로 시작되었을 땐 소름이 돋았다.


나의 야구가 이제 이렇게라도 시작되나 보다 했다.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다.

직관 이후에도 우리의 방송은 시작되지 않았다.


시간이 몇 주 더 흘러 결국 기다림의 한계까지 이른 것 같았을 때 유튜브에서 송출된다는 영상이 올라왔다.

그 소식을 들으며 드디어 시작한다는 기쁨이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유튜브에서 이 방송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인지 경악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나의 야구를 응원하는 마음은 내가 손쉬운 플랫폼에서 볼 수 있다는 기쁨보다, 수익구조가 세워지지 않으면 이 야구가 지속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더 컸다. 그럼에도 한 편으로는 그렇게라도 시작된 야구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방송을 보면 고척에서 첫 경기를 준비하던 한창, 김성근 감독이 웜업 때 나와 선수들이 꽉 찬 운동장을 보며 “부잣집에 온 것만 같다”라고 표현했는데 그 표현이 나한테는 참 심금을 울리는 표현이었다. 정말 부잣집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부잣집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은 마치 정말 저녁 식사 자리 한 번 부잣집 친구네 놀러 갔다 온 기분처럼 그 찰나뿐이었다. 내 사업이 아님에도 유튜브를 통해 이게 그 수많은 선수들과 스텝들의 인건비라도 나오는지 걱정이 되던 즈음 영상이 삭제되기 시작했다. 처음 영상이 삭제되었을 때는 유튜브코리아와 협의해 며칠 뒤면 다시 올라갈 것이라고 했지만 공지와 다르게 며칠이 지나도 복구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몇 번 삭제되면 채널이 정지될 수 있다는 더 무서운 걱정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겨울만큼 춥던 봄에 나는 정말 그렇게 나의 야구가 결국 시간 싸움에서 이기지도 버티지도 못한 채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현실판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는 당연히 다윗이 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들려온 소식이 대전시와의 MOU 체결이었다.


우리는 실컷 플랫폼을 따내야 한다, 광고가 붙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을 때 이건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다. 협력자가 붙었는데 방송국이나 기업이 아닌 대전시라니. 저녁에 운동을 하고 돌아가던 길 기사를 읽고 너무 놀라 집에 도착해 우리의 야구가 어쩌면 살아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데 그게 방송국도 기업도 아닌 대전시와 협력한다는 그런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라고 전하던 게 생생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싶었다. 그러더니 우리의 야구는 그때부터 마치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나듯 스폰서들이 하나 둘 붙기 시작하고 광고가 셋넷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완벽한 정상가동을 하게 되었다.



정상가동에서 멈추는 수준이 아니었다.


직관은 작년에도 여러 번 했지만 전국순회라는 이름으로 고척뿐만이 아니라 사직, 문학, 울산 등 전국으로 번졌다. 게다 유튜브에서 영상이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의 충격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아예 자체 플랫폼을 구축하며 안정적으로 영상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번 다시 어떤 방송국도 못 만날 줄 알았더니 아예 새로운 스케일의 방송국 생중계를 물어와 생중계는 새로운 캐스터와 해설위원, 기존 편집된 방송은 기존 캐스터와 해설위원으로 방송을 이중화하는 아이디어까지… 콘텐츠도 수익도 이렇게 다각화할 수 있나 싶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지난주, 드디어 몇 달 전 회복의 신호탄을 알린 대전시와 MOU 체결 내용이었던 불꽃야구 전용구장 파이터즈파크에서의 첫 직관 예고 영상이 올라왔다.



“이건 단지 시작일 뿐”


나는 위기가 기회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 그 말은 사실일 때가 많지만, 살아내기에 참 버거운 말이기 때문이다. 평생 하나 겪을까 말까 한 일들을 한 달에 하나, 일주일에 하나, 나중엔 하루에 하나씩 겪으며 위기가 기회더라도, 기회도 필요 없으니 위기도 이제 제발 더 이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꿈 많고 두려움 없던 시절의 나야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요셉처럼 총리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노예로도 안 팔렸으면 좋겠고, 욥처럼 몇 배의 재벌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모든 걸 다 잃어버리는 고난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름 석자 새기고 싶었던 시절은 옛날이고, 이제는 아무 대사 없이 조용히 지나가는 아무개로 살고 싶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노래 가사가 반복되는 4분 25초짜리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면서, 장시원 PD는 이 위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기적을 만들어낼 기회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시원 PD는 만약 안정적으로 계속 방송사와 제작을 이어갔다면, 백지수표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 마냥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의 야구를 발전해 나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쓰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시원 PD는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악화되는 여건에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구나, 이건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골리앗과의 싸움이었구나 포기해 가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또한 안정적인 환경에서 구축해 나가던 작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새로운 수준의 꿈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써 내려가는 야구가 유한한 이야기에서 무한한 이야기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제법 쌀쌀해진 공기가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고 새벽공기를 들여오며 손에 하나뿐인 야구공을 쥐고 마음속으로 굴비처럼 줄줄이 이어질 회복에 대한 주문을 걸었다.


“이건 단지 시작일 뿐”


회사의 회복, 가정의 회복, 개인의 회복, 다음 세대의 회복, … 발끝부터 손끝까지 모든 세포에 퍼져나가는 회복. 너무나 빨리 일어나는 회복의 속도에 미처 다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하나의 회복이 끝나자마자 연달아 오는 그다음의 회복. 모든 회복이 동시에, 모든 곳에, 순식간에 일어나는 회복.


이건 단지 시작일 뿐



이건 단지 시작일 뿐


수많은 타이틀과 상을 휩쓸어 이게 이 프로그램의 정점이겠다고 생각했던 2024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이번 계절, 세계를 넘어 우주로 장시원 PD가 써 내려가는 마법이, 단지 즐거운 방송의 팬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후배로서 내 삶에 교훈으로 가져다 써야겠다는 회복의 꿈을 꾸게 된 한 주였다.


회복이 동시에, 순식간에, 연달아서, 모든 곳에

그 모든 역경과 시련과 고난을 말끔히 흔적도 없이 씻어내려 버리는 것만 같이

기적의 연속인 회복


이건 단지 시작일 뿐



이건 단지 시작일 뿐



이건 단지 시작일 뿐

정말 부잣집에 온 것만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Q5LG9pxRh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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