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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나의 마음속에도 너무나 많은 신재영이 있었다

원히트 원더가 아닌, 완벽하게 마운드로 복귀한 신인왕이었다

by 일요일은 쉽니다


2025년 혼돈의 봄을 맞이하며 매주 시작되지 않는 방송을 기다리다 첫 직관 소식이 떴을 때 망설일 것도 없이 티켓을 예약했다. 그리고 늘 경기가 끝나고 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는데, 그날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 고척돔 근처 시장 구경을 했다. 그러다 사람이 가득 찬 순두부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중 고척돔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이 보여 일단 따라가 보니 선수들의 퇴근길을 기다리고 있던 인파였다. 이미 경기 끝나고 한 시간, 한 시간 반 정도 지났던 지라 우리도 5분만 기다려볼까? 하는 마음으로 그 무리에 같이 서있는데 거짓말처럼 정말 5분 만에 이대호 선수를 시작으로 몇몇 선수들이 기다리는 팬들에게 인사하러 나왔다.


퇴근길을 보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한 번도 기다리려 한 적은 없지만, 운 좋게 취소표를 구할 때면 항상 가방 안에 내 책상 위 올려두었던 야구공과 네임펜을 챙겨 갔었다. 한 번도 굿즈를 사 본 적은 없는데 무슨 바람인지 우연히 봤던 <스토브리그> 드라마가 <미생> 이후로 너무 마음에 남아 이미 드라마가 끝난 지 한참 후였는데도 야구공 굿즈를 시키고 내 책상 한 편에 올려두었었다. 그러고 나는 항상 그 공을 가방에 넣어 챙겨가고는 했다. 깜짝 놀라 가방 속에 늘 준비해 두었던 야구공과 네임펜을 꺼내 그 인파를 뚫고 어떻게 사인을 받아야 하나 뒤에서 벙 찐 채 쳐다보고 있을 때, 이대호, 유희관 선수 다음으로 신재영 선수가 나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대호 선수를 보다니! 하는 신기한 마음에 다가갔지만 내가 그 인파를 뚫고 사인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건 신재영 선수가 나왔을 때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나의 최애는 신재영 선수였다. 나는 기존 야구팬이 아닌 채로 불꽃야구에 유입되었고, 내가 프로그램에 빠지게 된 것의 8할은 김성근 감독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닮고 싶은 리더상이자, 살면서 한 번은 만났으면 싶은 스승상이었다. 은퇴한 선수들이 느슨하게 야구하던 분위기에서 현역 선수들이 전력을 다하는 분위기로 바꿔놓은 장본인이었고, 그 리더의 진심이 선수들에게 또 제작진에게 전파된 후 매주 거듭나는 모습은 독보적이었다. 그 유명한 "돈 받으면 프로다"의 정신이 점점 침투하는 한 주 한 주를 보며 유니폼을 사면 무조건 마킹은 김성근 감독 이름으로 하겠다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이 신재영 선수로 향하게 된 것은 2023년 겨울 시즌을 마무리하며 진행한 시상식 때문이었다. 가장 기대되는 두 가지 시상 중 박재욱 선수가 신인왕을 받고 MVP 시상으로 넘어가려던 순간, 장시원 PD는 "그런데"로 말문을 시작하며 "신재영이 신인왕에 못 미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이 선수에게 신인왕을 [주지 않으면] 최강야구를 안 하든 다른 프로그램을 하든 저 선수가 계속 떠오를 거 같다"며 공동 수상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박재욱 선수도 신재영 선수도 충분히 받을만하다는 마음으로 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신재영 선수는 상을 받으러 올라가자마자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방송을 보며 아찔하고 짜릿했던 순간들이었지 울면서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신재영 선수가 고개도 못 들고 눈물을 계속 흘릴 때, 스크린 반대 편에서 그 모습을 보며 같이 눈물을 흘리는 내가 있었다. 왜 눈물이 나냐는 장시원 PD의 질문에, 그는 예전에 신인왕을 받았던 시절이 생각나고, 그때 신인왕을 받고 나서 좀 더 잘할걸이란 생각이 많이 나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는 신재영 선수가 울어서 같이 운 것이 아니라, 신재영 선수의 그 말이 마음에 맺혀서 같이 울었다. 그 마음의 후회들이 썰물같이 바다 쪽으로 밀려 나가서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듯 잠시 잊고 살다 또 한 번의 신인왕을 받았을 때 그 밀물이 한꺼번에 밀려오듯 후회가 넘쳐흘러버린 그 마음이 내게도 건네졌다. 신인왕을 손에 쥐었을 때 그 밀물이 그 마음에 한꺼번에 밀려왔듯, 신재영 선수가 그때 좀 더 잘할 걸이란 후회를 내뱉었을 때 사막처럼 메말러버렸던 나의 바닷가에 그 같은 밀물이 한꺼번에 파도치며 넘쳐버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후회를 끌어안고 사는가.


대부분의 후회는 해소되기보다 그저 바다의 썰물이 빠져나가듯 안 보이는 저 멀리 나갈 뿐이라 생각지도 못한 순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 후회의 밀물이 한꺼번에 밀려와 압도하는 순간, 그건 꾹꾹 눌러 담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저 땅 깊숙이 내가 내 모든 후회를 이제는 삭혔다고 생각했더라도 어느 날 그 흙속에서 싹 틔운 풀잎 하나를 보고도 마음이 쓰나미처럼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2016년 데뷔하고 그 해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며 신인왕을 탔다.

그런데 2017년 기록이 안 좋아지고,

2018년 기록이 더 안 좋아지고,

2019년부터 경기 출전이 줄어들다가,

이적 이후에도 회복을 못하고

너무나 짧은 6년의 선수생활을 후 2022년 방출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너무 강렬했던 첫 시즌의 임팩트 이후 한 번도 그와 같은 결과를 내지 못해

"원히트 원더(one-hit wonder)"라고 묘사되기도 했다.

그 원히트 원더가 은퇴 후 다시 잡은 인생의 기회에서

예전의 그 똑같은 신인왕을 타게 되었을 때

그 선수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썰물과 밀물이 요동쳤을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우는 신재영 선수와

그 뒤에서 같이 눈물을 훔치는 형들을 보며

또 얼마나 많은 우리가 그 같은 아픔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을까.

성공했던 그 마운드에서 무너졌고,

무너졌던 그 마운드에서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기회가 주어진 그 플레이트 위에서 다시 공을 던졌고

다시 공을 던진 그 플레이트 위에서 결국 일어섰다.

현역의 아쉬움과 후회와 쓰라림을 매 경기 꾹꾹 눌러 담아 공에 모두 쏟아냈다.

어느 연습 경기 영상에서 감독님에게 본인도 선발로 나가고 싶다 용기 내어 말씀드릴 때

감독님이 모든 선수는 다 자기의 자리가 있다고 하셔서 형들이 놀렸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느샌가 신재영 선수는 원투펀치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선발을 나가고 있었고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도 다 지쳐 쓰러지는 더위 속에도 안정적으로 이닝을 끌어갔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진 시즌의 끝에서

신재영 선수는 장시원 PD 말대로 신인왕을 주지 않으면 계속 마음속에 떠오를 만큼

일 년 내내 과거 6년에 대한 아쉬움을 공 하나하나에 모두 쏟아냈고

겨울이 찾아왔을 때 MVP를 받은 이대은 선수와 함께 명실상부한 에이스가 된 신인왕 신재영이었다.

신재영은 원히트 원더가 아닌, 완벽하게 마운드로 다시 복귀한 신인왕이었다.



돌아보면 나의 마음속에도 너무나 많은 신재영이 있었다.


신인왕 이후 하락세를 보이다 결국 바닥을 친 너무나 많은 나 자신들이 있었다.

시간이 가면 그 기억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더욱 애써 그 상처를 다시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가끔 그 마운드에서 잘 던지는 경기도 있었고, 그러다 그 마운드에 화려하게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시즌도 있었지만, 때로는 안타와 홈런, 그리고 때로는 볼넷으로 더 많은 나날을 그 마운드 위에서 또 무너져버렸다. 나는 수많은 '一球二無(일구이무)'의 마음으로 임했지만 나의 끝없는 마음으로는 부족해 그 결과가 안타와 홈런 그리고 볼넷인 날들이 더 많아졌고, 그 일구이무는 그냥 말 그대로의 일구이무로 잊히고 말았다. 그 같은 마음이 통해 신재영 선수가 어쩌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때 나도 그 반대편에서 같이 눈물을 흘렸고, 그건 아마 신재영 선수처럼 신인왕의 서사를 써 내려갔던 바로 그 마운드 위에서 무너져내려 버린 나 자신도 이제는 구원해주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그다음 시즌부터 팀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를 꼽으라 하면 망설임 없이 신재영을 답했다.


그래서 나는 신재영 선수가 동아대와의 경기에서 처음 출전을 했을 때 경기장에서 같이 눈물을 글썽였고, 연천미라클과의 경기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맞았을 때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까 걱정했는데, 얼마 전 방송된 경기에서 역시나 인터뷰 중 주체하지 못하고 우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밀물과 썰물이 몰려왔다. 얼마나 우리는 이 경기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가. 그러나 얼마나 때로는 그 결과가 우리의 진심과는 다르게 흘러가는가.



그리고 곧바로 지난주에 장충고와의 경기가 방송되었다.

1사 만루, 직전 연천미라클과 똑같은 상황에서 이대은 선수가 신재영 선수와 교체되고 동료들은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신재영은 차분하게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하나. 그리고 뒤에선 이택근 선수가 "그때 그렇게 던졌어야 해"라고 외칠 때 신재영은 남은 세 번째 아웃 카운트 또한 삼진으로 잡았다. 직전 경기에서 만루홈런을 직후 경기에서 연속삼진으로 이겨냈다.



이 시리즈에서 꼭 한 번 신인왕 수상 후 그 한 장면으로 나의 최애가 된 신재영 선수만을 위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공교롭게 최근 방송에서 다시 한번 무너지고, 그 무너진 마운드 위에서 또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이보다 적절한 시점이 있을까 싶었다. 더 이상 원히트 원더가 아닌, 더 이상 구원해주고 싶은 구원투수도 아닌, 팀을 또 본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또다시, 또 한 번 구원해 내는 투수가 마운드 위에 서있었기에 밀물과 썰물이 흐트러트리고 지나간 나의 바다에는 끝끝내 놓지 않고 버텨낸 모래사장이 있었다.



확실한 점수로 운영되는 프로스포츠에는 자비가 없지만

어쩌면 인생에는 자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프로에서 신인왕 이후 사라진 선수가

인생에서는 또 한 번의 신인왕을 타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신인왕 이후 다시 부진함에 빠진 선수가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에 나와 누구보다 꾸준하게 노력하는데

형들 말대로 그 덕분에 이긴 경기가 더 많지만

그 때문에 진 한 경기를 두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계속 운다.

다시 또 더그아웃 생활이 반복될까 걱정돼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그 설욕을 풀고 만회를 한다.

이번에는 그 같은 마운드에서 이겨낸다.

결국 팀을, 또 본인을 구원해 낸다.



하루 늦었지만 신재영 선수의 생일을 축하하며.


https://www.youtube.com/watch?v=I7_VJ3HSd_c

https://www.youtube.com/watch?v=NRaUDXXclGY&t=103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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