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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영 Jul 14. 2018

삼국연의

1-1 도원결의

멀찍이서도 벌써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이곳에도 황색바람이 불어 닥친 것이다. 유비(劉備)는 걱정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설렘을 가지고 성문으로 달려갔다. 

과연 방문(榜文)은 의군(義軍)을 모집한다는 유주(幽州) 태수 유언(劉焉)의 초모방(招募訪)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유비가 기다리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탁현의 장사들이 자신을 따르고 있지 않았던가. 소쌍과 장세평 두 거상이 천금을 던져 그에게 의탁한 것도 이런 때를 기다렸던 때문이리라.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유비의 미간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유비는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내대장부가 나라가 위험에 빠지면 마땅히 목숨을 내놀 작정이지, 무슨 놈의 한숨이요!”

뇌성이 이는 듯한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유비가 돌아보니 8척 장신의 텁석부리 거한이 고리 눈을 치켜뜨고 유비를 쏘아보고 있었다. 

안광이 흉흉했으나 겉모습과는 달리 아직 소년티를 완전히 못 벗은 상태였다. 쓸만한 인재임에 틀림없어보여 유비는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말한 텁석부리에게 외려 빙그레 웃어 주었다. 유비의 여유로운 모습에 텁석부리는 기세가 좀 수그러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유비의 외모는 비범한 데가 있었다. 

키는 7척5촌에 이르러 훤칠했으며, 귀가 커서 어깨에 닿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거기에 팔도 길어서 늘어뜨리고 있으면 무릎에 이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특이한 외모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유순하면서도 단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금 그의 눈은 한없는 선의를 담고 있었는데, 제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눈길 앞에서 성질을 부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흠, 흠. 내 말이 지나쳤다면 미안합니다. 난 연나라 사람(燕人)으로 성은 장(張), 이름은 비(飛)라 합니다.” 

유비는 그 말에 깜짝 놀라 급히 인사를 했다. 

“그럼 그대가 창술로는 유주에 적수가 없다는 장익덕(張益德)이란 이야기군요!”

이번에는 장비가 놀랐다. 유비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이름뿐만 아니라 자(字)도 알고 있었다. 이름은 부모가 준 것이라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예법이어서 이름 이외에 자라는 것을 지어 부모나 군주 이외의 사람들은 그 자를 부르는 것이 예의였다. 

유비가 놀란 것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얼굴에는 한줄기 빛도 떠올리지 않은 것과는 달리 장비는 표정이 솔직하게 얼굴에 나타났다. 장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뉘시기에 이 하찮은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탁현의 유비라는 사람으로 자는 현덕(玄德)이라고 합니다.” 

“어이쿠!” 

장비가 손뼉을 쳤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닐꺼라고 생각했습니다. 유 형님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나 역시 막대 하나만 있어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장 형을 만나서 영광이외다.”

“자꾸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돼지나 잡고 술이나 거르는 촌놈일 뿐입니다. 어디 종실의 피를 이은 유 형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나야말로 짚신이나 삼고 돗자리나 켜는 보따리 장수에 불과하지요.” 

사람좋게 웃는 유비는 그러나, 유주의 임협(任俠)사회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세상 어디에나 공권력이 있는가하면 음지에서 제 나름의 무력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대에 따라 그들의 이름은 달라지지만 역사에서 사라져 본 적은 없다. 중국 사회에서 이들을 임협이라 부른다. 흔히 우리들이 말하는 협객이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마천(司馬天)은 <사기(史記)> 유협(遊俠)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 유협은 그 행위가 반드시 정의를 따른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말에는 신의를 다했고, 행동은 과감했으며, 한번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 바쳤다. 또한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남의 어려움을 해결함에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을 뽐내지 않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것을 수치로 삼았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은원관계를 사사로이 해결하려는 임협은 공권력의 적이기 때문에 국가의 힘이 강대하면 임협의 힘은 그만큼 잦아들었다. 

한 무제 때의 곽해(郭解)는 중원에 명성이 자자한 대협이었지만 결국 일족이 모두 주살되고 말았다. 그것은 국가 권력과 임협의 권한이 충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무제(武帝)는 원삭2년(127년)에 지방 호족들과 수도의 부호들을 무릉(茂陵)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때 곽해는 재산으로는 어림도 없는 인물이었지만 그 명성만은 천하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 이주를 시키기도, 안 시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무제의 오른팔이었던 위청(衛靑) 장군은 곽해를 위해서 무제에게 진언했다. 

“이주자 명단에서 곽해라는 자를 빼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곽해? 곽해가 누구냐?”

“그저 가난한 평민에 불과합니다. 약간의 허명을 얻고 있어서 이주 대상에 포함되었던 모양입니다.” 

무제는 손을 내저었다.

“한낱 평민을 위해서 짐에게 수고를 끼치려 한단 말인가? 그자는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겠구나.”

이리하여 곽해 집안도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곽해를 위해 사람들이 환송금으로 모은 것이 천만 전이 넘었다고 하니 그의 위명을 쉬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곽해가 이주 대상에 포함된 데에는 뜻밖의 사연이 있었다. 곽해의 동향 사람 중 양계주의 아들이 현의 속관으로 있으면서 곽해를 이주시켜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었다. 곽해의 조카가 그를 살해했다. 곽해가 관중으로 이주한지 오래되지 않아 양계주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양씨 가문에서는 곽해를 벌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올린 사람마저도 궐문을 나서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일이 이쯤되자 무제는 곽해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곽해는 적소공의 도움을 받아 관중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적소공은 곽해를 본 적도 없었는데도 그를 도망치게 도와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협객의 의기를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곽해의 행방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곽해는 그 후 전국에 대사령이 내려진 다음에야 체포되었고, 따라서 그의 죄를 따질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또 한 가지 일이 생겼다. 

곽해의 죄상을 조사하러 곽해의 고향으로 내려온 관리가 그곳의 한 선비와 곽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비가 곽해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협객 한명이 그 선비를 죽여버리고 혀를 잘라내버렸다. 본래 이 일 자체는 곽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 곽해에게 죄를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사대부(御史大夫) 공손홍이 강력히 반발했다. 

“곽해는 평민인 주제에 임협이라고 떠들어대면서 함부로 권한을 휘두르고 사소한 원한을 가지고 사람들을 죽였소. 이번 일을 곽해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곽해 본인이 살인을 저지른 것 보다도 더 나쁜 일이오. 마땅히 곽해의 죄는 대역무도로 다스려야 하오!”

공손홍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곽해의 일족은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사마천은 곽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애도한다.      

- 나는 곽해를 보았지만 그의 용모는 보통 사람에도 미치지 못하고 말솜씨도 별볼일 없었다. 그러나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에서부터 못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를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 그의 명성을 흠모했다. 스스로 협객이라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이름을 내세웠다. 속담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흠모하는 빛나는 명성이 어디 다할 때가 있으리'라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유비나 장비 역시 국가권력이 해이해지기 시작한 후한말의 호걸들로 자연히 자신들을 따르는 세력을 거느리게 되었으니, 이것은 명문 일족으로서 자신의 세력을 두고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결국 한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도 없었다. 

“우리 여기서 이렇게 떠들 것이 아니라 어디라도 들러서 탁주라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합시다.”

유비는 장비의 소매를 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비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장비는 술 한 잔이라는 말도 말이지만 그의 공손한 태도에 더욱 마음이 기꺼워 유비를 따라 나섰다. 

둘이 좌정을 하고 인사치레 술이 한 순배 돌았을 때 주루의 문이 벌컥 열렸다. 봄향기가 확 문을 통해 밀려들어드는가 싶더니 주루 문이 온통 가려질만한 거한이 성큼성큼 문을 들어섰다. 주루 안의 눈이 순식간에 그 사내에게 쏠렸다. 사내는 그런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온 봇짐을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주인장! 여기 탁주 한 사발 가져오시오! 목을 축이고 초모에 응하러 갈 참이니!”

그의 목소리도 우렁찼지만 초모에 응하러 왔다는 말에 사람들은 그에게 준 눈길을 떼지 못했다. 키가 9척은 족히 되리라. 대춧빛 붉은 얼굴에 봉의 눈. 무엇보다도 두자나 되는 윤기 흐르는 검은 수염이 그의 위풍당당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대장부로다.”

유비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장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비는 바로 대춧빛 사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긴 수염 속에 가려진 얼굴은 아직 앳돼 보여 장비보다 그저 몇 살 위일 것 같았다.

“형장, 초모에 응하러 오셨다니, 호걸의 기상입니다.”

장비가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읍을 올리는 자세로 예를 표하고 말을 붙이자 사내도 기다렸다는 듯이 받는다. 

“형장도 초모에 응할 생각이 있습니까?” 

“나라가 위태로우면 사내가 나서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형장과는 말이 통하겠군요.” 

사내도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장비가 맘에 든 모양이었다. 장비는 내친 김에 그를 유비의 자리로 이끌고자 했다. 

“형장, 우리 형님을 만나보시겠소?” 

대춧빛 사내는 장비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유비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읍을 했다. 장비의 힘찬 자세와는 달랐으나 품위있는 인사였다. 유비의 격조있는 태도에 사내도 흥미가 일었다. 

“그럽시다.” 

사내는 유비 앞으로 와 인사를 했다. 

“나는 성은 관(關), 이름은 우(羽)라고 합니다. 자는 장생(長生)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운장(雲長)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유비와 장비도 서둘러 성명을 대고 셋은 자리에 앉았다. 

“아우가 불민하여 존성대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유비는 사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호걸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현의 말은 출신을 밝혀보라는 말인 셈이었다. 

“나는 본래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입니다. 토호 놈이 세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기에 한칼에 베어버리고 고향을 등졌습니다. 강호를 유람한지 오륙년에 황건의 난을 만나 대사면이 내렸기에 국은에 보답할 각오로 초모에 응할 참입니다.” 

관우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아무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담담했다. 때문에 왜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지 묻고 싶은 장비도 입을 벌릴 수 없었다. 유비도 두 번 묻지 않았다. 관우의 나이, 유비보다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살인을 하고 강호를 누빈 폭이다. 

하동군 해현은 멀리 서쪽으로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여기 중국대륙의 북쪽 끝까지 허위적 허위적 도망쳐왔을 때 그 고생은 오죽했으랴. 

해현은 소금 호수인 해지(解池)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 지역은 중국 한족들이 시조로 여기는 황제(黃帝)가 치우를 잡아 죽인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황제는 치우의 사지를 찢었는데 이것을 한자로는 지해(肢解)라고 쓴다. 해지(解池)의 해(解)는 이 지해(肢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해지는 지면에 노출되어 있는 호수라 소금을 생산하는데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소금은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한 식품이었기에 한나라는 소금을 나라가 직접 관리하는 전매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소금으로 생기는 이득은 막대해서 그 안에 관리와 토호들의 농간이 끼어들 것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관우 역시 이 지역 출신으로 그런 토호의 전횡을 보고 어린 치기를 참지 못해 손을 쓴 것이 그만 관리 살해라는 중죄로 이어지고 말았다. 관우는 출신을 밝히며 잠깐 떠올랐던 고향 생각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사실은 두 장사가 성문 앞에서 나누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의기가 통하는 분들이라 여겨져서 쫓아온 것입니다. 특히 유 형은 보통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 필시 내력이 있으신 분일 것입니다.” 

“관 형, 잘 보셨소. 이분은 당금 황실의 종친. 우리와는 피가 다른 분이지요.”

장비가 마치 제 일처럼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역시 그랬군요.” 

관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유비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고만 있다. 

유비는 한 경제(景帝)의 후손이다.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탁군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주금(酎金)을 조금 바쳤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했다. 주금이라는 것은 황제가 묘당에 바친 술을 제후들이 마시는 대가로 내놓는 일종의 술값이다. 햇곡식으로 빚은 술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를 빌미로 세금을 거두는 셈이었는데 이때 주금이 마땅치 않으면 작위를 뺏기거나 봉 토를 삭감 당했다. 육성정후 유정(劉貞)도 결국 이렇게 해서 평민이 되고 만 것이다. 

이들의 후손은 대대로 탁군에서 눌러 살았다. 유비의 할애비 유웅(劉雄)은 효렴(孝廉:한대의 관직 추천 방식. 20만의 인구 당 한 명이 추천받아 관직에 나아가게 된다. 본래는 효성스러운 자와 청렴한 사람을 뽑는다는 의미였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해서 효렴이라 부르게 되었다)으로 관직에 나아가 동군 범현의 영(領)을 지냈고 현의 애비 유홍(劉弘)도 주군(州郡)의 일을 돌보았지만 유비가 어린 나이 때 죽었기에 유비 집안의 가세는 형편없었다. 

유비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짚신이나 돗자리를 짜는 일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기가 죽는 일이 없는 활발한 소년이 유비였다. 

이 집 앞마당에는 높이가 다섯 장쯤 되는 뽕나무가 있었다.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해서 멀리서 보면 멋진 수레덮개처럼 보였다.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들도 이 나무를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이 나무로 인해 이 집에서 귀인이 나올 거라고 장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미 어려서부터 동네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유비가 애들을 나무 밑에 모아놓고 ‘내가 뒷날에는 깃털 장식된 개거(蓋車)를 타고 말거야.’라고 호언장담한 일이 있다. 

하필 이때 그곳을 지나던 유자경(劉子敬)이라는 아재비가 그 말을 듣고 기절초풍을 했다. 깃털 장식된 개거라는 것은 천자의 수레를 가리키는 말이다. 황실이라고 해야 핏줄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집안의 꼬마가 천자가 되겠다고 말을 내뱉으니 혹여 말이 잘못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멸족이 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이 녀석! 어디서 감히 허튼 소리냐!”

 유비는 냉큼 나무에서 뛰어내려 달아났다. 

“그따위 소리는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마라. 집안 도륙내고 싶지 않으면!” 

유자경은 달아나는 유비의 등에다 대고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반면에 이런 유비를 좋게 본 아재비도 있었다. 유원기(劉元起)가 바로 그인데 다행히 이이는 재산도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덕연(德然)과 함께 유비를 공부시켰다. 

유비 나이 열다섯에 글을 배운 스승이 후한(後漢) 명사 중에도 손꼽히는 노식(盧植)이었다. 또한 이때 후일 요동, 요서를 아우르는 공손찬(公孫瓚)과 동문으로 지내며 호형호제하게 되었으니 유원기의 은혜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유원기의 아내는 이런 남편이 마땅치가 않았다. 

"후일에는 각기 다른 일문을 세우게 되는 것인데 대체 언제까지 비의 뒷바라지를 하실 작정이우?" 

"그런 소리 말게. 그 아이야말로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야. 보통 아이가 아니란 말일세." 

유원기는 늘 그렇게 말해서 아내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유비는 스물이 넘도록 저자거리에서 호한 소리는 들어도 집안을 일으킬 재목 같지는 않아 보였다. 돈이 모자라는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집안에 가져오는 것은 자기가 삼은 짚세기에서 나오는 돈 정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아랫사람들에게 후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더욱이 시골 마을치고는 배움이 깊은 폭이라 젊은 나이에도 주위에서도 그 학식을 인정해 주는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친화력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것이어서 어떤 싸움이건 그가 나서서 중재를 하면 풀리지 않는 법이 없었다. 

“성문에서 유형을 보았습니다. 깊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무슨 연유가 있는 듯 했습니다만…….”

“옳게 보셨습니다.” 

유비는 술을 두 사람에게 한 잔씩 치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두 형을 만나 마음속의 고민을 말끔히 풀었습니다.”

유비의 얼굴이 돌연 엄숙해졌다. 사람 좋아만 보이는 그의 얼굴이 이렇게 위엄을 갖추자 또한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감돌았다. 

“이 유현덕, 그동안 세상을 바로잡고자 뜻이 맞는 협사들과 같이 생활해 왔습니다만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호걸을 만나지 못함을 한탄해 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두 형을 만나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현덕을 불쌍히 여겨 은인을 보내 주신 것 같습니다. 부디 번거롭다 마시고 이 몸과 같이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는데 힘을 합쳐 주십시오.” 

의기남아는 한순간에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다. 유비의 말에는 한 푼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았다. 그의 간곡한 어조와 사람을 이끄는 힘에 관우와 장비는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 사람 모두 아직 새파란 나이의 청년이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고 거칠 것이 없는 나이였다. 

“이 몸은 고향을 떠나 온 이래 혈혈단신이었습니다. 이제 유 형이 이렇게 나를 알아주시니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관우의 청동같은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동군 해현을 야반도주하듯이 떠난 지 몇 해만에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내를 만났다. 자신의 힘을 본 것도 아니오, 자신의 기량을 재단해 본 것도 아니다. 그저 사내로써 뜨거운 가슴만으로 의기가 투합하는 사내를 만난 것이다. 

“유 형, 관 형! 잠깐 한마디 하겠습니다!” 

장비가 관우가 뭔가 더 하려는 말을 끊었다. 

“오늘은 우리가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무예나 논합시다. 우리 집 뒷동산에 지금 복숭아꽃이 한창이라 제법 볼만하답니다. 우리 내일 거기서 천지신명께 고하여 결의형제를 맺고 생사고락을 같이하도록 맹세합시다!” 

장비의 말은 두 사람의 구미에 딱 맞았다. 세 사람은 밤새 술을 퍼마셨다. 관우는 글을 좀 읽어서 유비와 말이 통하고, 무예 또한 절묘한 데가 있어 장비와도 죽이 맞았다. 세 사람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서로에게 믿음이 가고 세상이 넓어서 이렇게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게 되었다. 그들은 밤새 몇 동이의 술을 비우며 세상을 향한 푸른 꿈을 털어놓았다. 

다음날 아침 세 사람은 말을 달려 탁군의 장비집으로 달려갔다. 은근히 세 사람이 서로의 말 타는 재주를 자랑하는 통에 평소 걸리는 시간보다 배는 빠르게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장비 집의 뒷동산은 분홍색 꽃잎이 물결쳐 바람이 한줄기 일 때마다 꽃잎이 춤을 추며 나리고 있었다. 

“보라,  운장, 익덕, 우리의 인생도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저 꽃잎과 같은 것이다.” 

유비의 말에 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남길 것은 의기천추(義氣千秋), 그것뿐이지요.”

“그렇다. 꽃잎은 땅에 떨어져 썩으면 그뿐이지만 의로운 이름은 그 향기를 천년세세 전할 수 있으니.” 

유비의 수하 하나가 백마와 검은 소를 끌고 도원(桃園)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제물이 왔으니 의식을 거행합시다.” 

 관우와 장비는 깜짝 놀라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느 틈에 이런 준비를 했습니까?” 

“익덕이 자리를 내주었으니 내가 제물을 준비한 거지. 어제 밤에 수하를 시켜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일러두었다.” 

세 사람은 이미 어제 술을 마시며 나이를 따지고 서열을 정했다. 유비가 가장 위였고 관우, 장비의 순이었다. 백마와 검은 소의 피를 받아 서로 나누어 마신 다음에 향을 태우며 금방 만든 제문을 유비가 읽어내려갔다. 

“천지신명께 고합니다. 이 자리의 유비, 관우, 장비 서로 성은 비록 다르지만 이제 의를 맺어 형제가 되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서로 돕고 의지하며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편안케 하오리니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나지는 못하였으나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를 바라오니, 황천후토(皇天后土)는 굽어 살피소서. 만일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는 자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이소서.”

갑자년 이해 유비 나이 스물 넷. 후한 영제(靈帝) 중평 원년(18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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