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중원의 황색바람
유, 관, 장 세 사람의 의기투합을 가져온 황건적의 난은 어떤 난리였을까?
하나의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항상 그 나라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계층의 붕괴가 선행된다. 고대국가의 근본은 농민에 있었기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후한말 수취체제가 무너지면서 농민들은 가렴주구에 의해 버틸 재간이 없어지게 되었다. 나라의 전권이 십상시(十常侍)라 불리는 열 명의 환관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바람에 이들에게 잘 보이고자 지방 수령들은 농민들을 쥐어짜 진상품을 마련하였으며, 새로 임지에 부임하는 관리들 역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십상시에게 엄청난 돈을 썼던 터라 본전을 챙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농민들을 괴롭혔다.
현세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항상 다음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때에 구세주라 불리는 인물이 나타났다. 하북성 거록의 장각(張角)이라는 사람이었다.
장각은 낙방수재로 몇 번 관리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약초나 캐서 근근이 끼니를 때우고 있는,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다.
하루는 산에 올랐다가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靑藜杖)을 지닌 노인을 만났다. 얼굴이 어린아이 같이 뽀얀 데다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어 한눈에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각아, 나를 따라오너라."
노인이 어찌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의심할 겨를도 없이 장각은 그가 이끄는 대로 한 동굴로 따라갔다. 노인은 동굴 안에서 책을 세권 내주었다.
"장각아, 이 책은 <태평요술(太平要術)>이라 한다. 인연이 있어 네게 이 책을 전하노니 마땅히 하늘을 대신하여 널리 사람들을 구할지니라. 만일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사사로운 생각을 한다면 그 앙화를 받을지니 명심 또 명심할 지어다."
장각이 곧바로 엎드려 절을 올리고 책을 받아들었다.
"과분한 사명을 내려주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인께서는 뉘신지요?"
"나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니라."
말을 마치자 노인은 일진청풍으로 변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남화노선이란 누구인가? 바로 호접몽(胡蝶夢)으로 유명한 장자(壯子)를 가리킨다. 도교에서는 노자(老子)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장자다. 그렇기에 도교를 다른 말로 노장사상이라고도 부른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라는 뜻이다.
장각은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내렸다고 확신했다. 이때부터 태평요술서를 밤낮으로 읽어 마침내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는 경지를 터득하고 말았다. 장각은 스스로 도호(道號)를 태평도인(太平道人)이라 붙이고 자신의 가르침을 태평도(太平道)라 부르며 무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태평도의 뿌리는 순제(順帝;126-144 재위)로 올라간다. 궁숭(宮崇)이라는 자가 황제에게 총 170권의 <태평청령서>를 바친 바 있었다. 궁숭은 이 책이 자신의 스승 우길(于吉)이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유교 경전과 일치하지 않는다하여 몰수 처분을 당했다. 그 뒤 환제(桓帝) 때에도 다시 황제에게 바쳐졌지만 여전히 용납되지 않았다.
태평도의 태평(太平)이란 본디 대평균(大平均)의 뜻으로 함께 일하고 재산을 함께 누린다는 뜻이 들어있다. 같은 교도가 아니라면 재산을 함께 누릴 수 없다. 이 교리 자체에 정부와 충돌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정부와는 같은 교도가 아니니 재산을 함께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이다.
태평경의 내용도 도를 닦고 수양을 하는 개인적인 부분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제세구민하는 치국의 도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장각은 낙방수재답게 조직의 기본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교도들을 철저히 관리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나누고 하나의 방에는 하나의 수령을 두어 그 직명도 방(方)이라 하였다. 하나의 방은 크면 일만 명, 적어도 육칠천 명은 넘었다.
마치 군대 조직과 같이 신도들을 정리하고 특별히 제자 오백 명을 가르쳐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도록 하였다. 그는 유교 경전을 공부했기 때문에 태평경이 갖고 있는 이념에 대해서도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변혁에 대한 꿈은 이미 이전부터 꾸었기 때문이다.
장각과 그의 제자들은 부적을 태워 질병을 치료하였는데 그 신통력이 광대하여 믿음을 가진 자는 질병에 고생하는 일이 없었다. 장각은 구절장(九節杖)을 잡고 부적으로 엎드린 병자에게 축복을 내린다. 그러면 병자는 자신의 죄를 모두 고백하고 부적을 태운 물(符水)를 마신다. 나으면 태평도의 교인이 되었고 낫지 않으면 믿지 않았다.
태평도는 특히 영제 광화 6년(183)의 대기근에 그 교세가 크게 신장하였다. 북방에 널리 교세가 확장되자 장각은 능히 천하를 아우를 수 있다는 욕심이 생겼다. 남화노선의 경고 따위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사실 숱한 농민들이 태평도를 믿은 것은 너무나 가혹한 현실 때문이었으며 장각이 아닐지라도 누구든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농민들은 그를 따랐을 것이다. 농민들에게는 단지 내일을 살 희망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장각은 요언을 지어 퍼뜨렸다.
-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나니
누런 하늘이 마땅히 세워지리라
때는 갑자년에 있으니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이 노래는 사방 천하에 퍼져 어린아이들조차 모르는 경우가 없었다. 푸른 하늘이란 한 왕조를 가리킨다. 누런 하늘은 바로 태평도의 세상을 의미했다.
또한 장각은 교도들에게 집집이 대문 위에 하얀 흙으로 갑자(甲子)라는 두 글자를 쓰게 하였던 바 청주, 유주, 서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 등 여덟 주에는 글자가 안 쓰인 집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 여덟 주는 낙양의 동쪽이며 장강의 북쪽으로 대개 중국의 동북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장각은 스스로를 대현양사(大賢良師)라고 부르게 하니 역시 집집마다 대현양사의 이름을 받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천하에 얻기 힘든 것이 바로 민심이다. 이제 민심이 우리를 따르는 데 이 기회를 놓친다면 실로 애석한 일이 될 것이다."
낙방수재로 권력의 꿈에 몸달아 있던 장각이 이제 천하를 굽어보고 싶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장보(張寶)와 장량(張梁) 두 아우를 불러들여 자신을 보좌하게 하고 조정안에 끄나풀을 만들고자 했다.
교도 중 신임하고 있던 마원의(馬元義)를 시켜 조정을 주무르는 십상시 중 하나인 환관 봉서를 매수하도록 공작을 시켰다. 봉서와의 내통은 의외로 쉽게 이루어져 봉서는 안에서 호응하기로 약정을 맺고 장각은 황색깃발을 만들고 다시 제자 당주(唐周)를 보내 거사의 날을 통보하려 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어그러졌다. 간이 작았던 당주는 봉서를 찾아가지 않고 바로 관아로 나아가 태평도의 반란 계획을 일일이 고해바치고 말았던 것이다. 영제는 이 보고에 놀라 대장군 하진(何進)을 불러들였다.
하진은 본래 소나 돼지를 잡는 백정 출신으로 그 출신이 미천하여 대장군의 지위를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뜻밖의 행운이 다가왔다. 누이가 궁녀로 들어가 영제의 눈에 그 미모가 띄었다. 곧 누이는 귀인(貴人)이 되었고, 황자(皇子) 변(辨)을 낳은 뒤에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백정의 누이가 하황후라 불리게 된 것이다.
본래 황후였던 송씨를 몰아내는데는 환관들의 참소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이때 환관들이 하황후에게 베푼 은혜는 뒷날 그들이 살아나는 계기가 된다.
하진은 즉시 봉서 일당을 투옥하고 마원의를 잡아다 목을 베어버렸다. 이 일로 옥에 갇힌 자가 천여 명이 넘었다.
천려일실로 아까운 기회를 놓친 장각은 지체없이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이미 선수를 놓친 터에 우물쭈물하다가는 앉은 자리에서 도륙이 날 판이었기 때문이다.
장각은 스스로를 천공장군(天公將軍), 아우인 장보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명명하고 무리들을 독려했다.
"이제 한의 운수는 다하여 큰 성인이 나셨으니 모두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정도를 좇아 태평성세를 누리도록 하라!"
고달픈 세상살이에 지친 농민들은 모두 누런 머리띠를 두르고 새 세상을, 지상천국을 건설하리라는 꿈을 꾸며 농구를 버리고 죽창을 손에 쥐고 장각의 뒤를 따랐다. 장각의 한마디에 일어선 농민들이 수십만에 달했다. 이들이 바로 황건적이다.
애초에 하진이 은밀히 일을 추진하여 반란의 싹을 자를 생각은 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사람들만을 문초하게 되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만 것이다.
황건적 변변한 무기도 없이 봉기하였지만 그 수가 원체 많은 사오십만에 달하는 대군이 되다 보니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한 지방의 수령들이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황건적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인수를 팽개치고 제 목숨 하나만 부지하는데 급급해 달아나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장각은 암살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자객사사(刺客死士)라 불리는 이들 암살의 전문가들은 장각이 지목한 사람들을 해치우며 황건적의 사기를 높였다. 뿐만 아니라 내부 단속에도 이용되어 대열의 이탈을 막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연일 관군을 격파해 나가며 황건적은 사기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고 무장도 착착 갖춰나가고 있었다. 더구나 후한의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은 태평도의 황건적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중에서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도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반란은 진압할 여력도 갖지 못해서 결국 이 지역은 오두미도의 자치구역으로 남게 된다. 또한 기주에는 도적의 무리인 흑산적이 날뛰었지만 아무도 진압할 수 없었다. 이들의 지도자 장연(張燕)은 무예가 대단해서 그를 '나는 제비'라는 뜻의 비연(飛燕)이라 부를 정도였다..
사방 각처에서 반란군과 도적들이 날뛰는 지경에 이르자 대장군 하진은 영제에게 상주하여 각처의 방비를 엄히 하고 도적을 쳐 공을 세우라는 칙명을 내리게 하는 한편 정예병을 보내 반란의 무리를 격파하게 하였다.
이때 관군을 이끌기 위해 임명된 사람이 셋으로 노식(盧植), 황보숭(皇甫嵩), 주준(朱雋)이었다.
노식은 바로 탁군의 현덕의 스승으로 후한의 거유(巨儒)였다. 노식은 구강과 여강 태수를 지내며 오랑캐의 반란을 진압한 바 있어 그 무재(武才)도 익히 인정받고 있었다. 그야말로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황보숭은 전 북지(北地) 태수로 북지는 바로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이다. 황보숭은 양주(凉州) 안정군 조나 땅 사람(흔히 서량이라고 말하는 곳이 이곳이다. 후일 오나라가 차지하는 강남의 양주(楊州)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으로 양주, 즉 서량은 서쪽 오랑캐 땅과 가까워 본래 숭무의 기질이 있는 곳이라 황보숭 역시 시서와 함께 기마와 궁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강직한 성품 탓으로 십상시의 미움을 받아 북지태수라는 외지로 보내졌다가 사태가 급하니 다시 불러들여진 것이었다.
주준은 전 교지 태수로 중국의 남쪽 끝인 이곳에서 악명을 떨치던 도적 괴수 양룡(梁龍)의 무리를 물리쳐 이름을 날린 바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실전경험이 풍부한 사람들로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기에 황건적의 난을 잠재울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