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_5
우리집 두 아이는 어려서 따로 학습지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 그냥 무작위 방문일수도 있지만 - 종종 학습지를 하라고 찾아오는 외판원(뭐라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다)이 있었다.
"아버님, 사람의 두뇌는 만5세만 다 성장하기 때문에 그전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고 언어 감각도 익혀야 한답니다."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자기네 학습지가 아이의 IQ는 물론 EQ까지 발전시킨다고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보험 권유하는 스팸 전화를 받아도 야멸차게 끊지 못하던 시절이었던지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거절을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하였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에 잘 놀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공부를 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우리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거절해야만 했다. 그러던 하루는 열심히 학습지를 권하던 사람이 우리가 안 한다고 말하자 정말 안 됐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아이에게 원망들으십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 앞서나가게 될텐데 왜 학습지를 안 하시려고 하시나요?"
그 사람은 정말 진심으로 젊은 우리 부부가 안스럽게 여겨졌던 것 같다. 악의를 품고 한 말은 절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내는 그 말에 많이 충격을 받았다.
"정말 아무 것도 시키지 않아도 되는 걸까? 아이의 재능을 우리가 개발시켜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아내는 그런 걱정을 했다.
첫째는 한글을 저절로 익히고 뗐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을 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잠들기 전에 늘 동화책을 읽어주었는데, 아이는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어려서 그랬기 때문에 같은 책을 읽어주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이가 만 네 살쯤 되었을 때, 내가 책을 읽어주는 동안 아이의 눈이 글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너 이거 지금 읽고 있니?"
라고 물어보자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몇 가지 글자를 읽어보게 했는데, 아이는 글자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첫째의 경험은 둘째를 기를 때 이용되는 법인데, 덕분에 나는 둘째도 자연히 한글을 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단한 오산이었다!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글자를 거의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가서 한글을 공부해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우리 부부는 어린이집에도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스트레스를 주지 말아달라고 부탁해 놓았었다. 어린이집은 우리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이미 다 한글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한글을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바로 알림장이라는 것에 교사가 하는 지시 사항을 적어와야 한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깜짝 놀라 한글 공부를 입학 한 달 전에 시작했다.
둘째가 좋아하는 만화 <포켓 몬스터>를 가지고 한글을 가르쳐보려고 했는데, 만화책 제목으로 큼직하게 적혀 있는 포켓 몬스터라는 글자를 써보라고 했더니...
둘째는 만화책의 장식글자체를 그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한글 자모만 대충 익혀서 학교를 갔으니 처음에는 알림장 내용도 엉망이었다. 자기가 써놓고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때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절대 사교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아이에게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아이들이 "원해서" 학원을 보낸다는 부모들도 있던데, 그건 조심해서 생각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원하기" 때문에 자신도 "원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
우리도 둘째가 수학 쪽으로 모자라는 게 많아서 학원을 한 번 보내볼까 했다. 집 근처의 학원에 갔다가,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친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바람에 기겁을 해서 포기하고, 이름이 좀 있는 학원에 데려가본 적이 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이미 다른 아이들은 중학교 수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는 기초가 없어서 수강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다.
아내는 다시 "나중에 원망 들을 겁니다"라는 말을 떠올리고 우울해졌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학원에서 공부해오는 것을 상정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학교 수업만으로는 수학과목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
우리는 어차피 보낼 수 없는 학원에 대한 미련을 끊고, 그 돈으로 여행을 다녔다. 그래봐야 많은 곳을 다닐 형편은 아니었지만... 학원을 보내지 못한 덕분에 아이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이들과 같이 온라인 게임을 하고(우리집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각자 자기 컴퓨터를 가졌다.)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내가 쓴 판타지 소설을 아이들이 함께 읽었다.
첫째와 둘째는 모두 자기들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고, 성적도 아주 우수하다. 덕분에 대학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원망을 듣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어린 시절을 즐겁게 회상한다.
세상이 우리를 걱정하게 만든다. 세상의 눈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이 아닌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 세상은 다른 사람을 너무나 많이 의식한다. 그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