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융합된 놀라움의 용광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Fruitvale Station, 2013)'로 장편 데뷔하고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마블영화 '블랙팬서' 시리즈를 연출했던 라이언 쿠글러의 신작 '씨너스 : 죄인들 (Sinners, 2025)'을 보았다 (이하 씨너스). 영화를 보기 전 최대한 정보를 얻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특별한 장면이나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 아니라면, 최대한 사전정보를 얻지 않고 보는 것이 역시 최상의 관람을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얻게 된 정보들이 있었다. 일단 뱀파이어가 나온다는 사실과 메인 포스터의 이미지다. 주연을 맡은 마이클 B. 조던이 총을 들고 서 있는 포스터로 미뤄봤을 때 그가 뱀파이어들에 맞서 싸우는 흔한 이미지가 예상됐다. 여기에 타란티노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From Dusk till Dawn, 1996)'나 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2009)'같이 호러와 재미가 뒤섞인 수작이었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실화나 원작이 있는 작품들만을 연출해 오던 라이언 쿠글러가 처음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으로 연출한 '씨너스'는 전작들의 완성도나 앞선 개인적인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영화였다. 영화를 본 지 며칠 째 계속 그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라이언 쿠클러는 마일스 케이턴(이번이 데뷔작이다)이 연기한 주인공 새미가 겪는 하루 동안의 일을 그린다. 1932년 미국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아직 노예제도가 사실상 잔존하고 KKK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이 성행하던 시기에 흑인 노동자 사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흥미로운 건 이런 배경 설정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으면서도 이런 배경이라면 꼭 필요한 이야기들도 여전히 끌고 간다는 점이다. 장르적으로나 주제면에서 각기 다른(하지만 모두가 메인이 될 만한) 요소들의 비중을 비슷한 수준으로 섞으면서도, 중구난방의 느낌 없이 완전한 하나로 융합해 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 중 하나다. 블루스를 중심으로 아이리쉬 민요에 이르는 음악/뮤지컬 영화로서도,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호러 영화로서도, 흑인 사회의 역사를 담은 영화로서도, 더불어 전설적 뮤지션의 전기 영화로서까지 성립 가능한 영화를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냈다.
이런 다양한 요소들을 그저 재미를 위한 양념 정도로 삽입하는 영화들은 많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각 요소가 모두 독립적으로 성립 가능하면서도 전체 이야기에 완벽하게 녹아드는 작품은 드물다. 흑인 사회의 역사를 담고 있는 블루스 음악을 겉핥기로 다루지 않고(후에 다시 다루겠지만 전설적 뮤지션 버디 가이가 특별출연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뱀파이어 영화라면 응당히 지켜야 할 규칙들에서도 어긋나지 않는다. 여기에 뱀파이어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묘사가 매우 흥미로웠는데, 이들이 설파하는 메시지 역시 단순히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닌 구원(그래서 모두가 평등한 존재가 되는)의 성격으로 다루고 있는 점도 이 영화를 훨씬 더 매력적인 작품으로 만든다.
앞서 영화를 보기 전 이랬으면 좋겠다 기대했던 '황혼에서 새벽까지'나 '드래그 미 투 헬' 같은 영화는 기본적으로 호러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달랐던 건 (특히 후자) 진짜 재미있는 호러 영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지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진짜 재미있는 호러 영화는 공포가 극에 달하는 어느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정도로 재미있는(혹은 희열이 느껴지는) 클라이맥스가 존재한다. 이를 테면 절정의 순간에 악령이 불위에서 춤을 춘다거나 하는 장면은 이런 희열이 맞닿는 순간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그런 희열을 '씨너스'도 혹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이 영화는 그렇게 가는 듯하더니 그것과는 또 다른 희열과 (심지어) 감동까지 선사하는 놀라움을 안겨줬다. 아.. 너무 황홀한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다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때 에필로그처럼 나오는 장면에 스토리 외적으로 소름 돋았던 이유가 있다. 바로 이 나이 든 새미의 역할로 등장한 배우가 다름 아닌 전설적 블루스 뮤지션 버디 가이 (Buddy Guy)였기 때문이다. 버디 가이라는 걸 알아챈 순간 정말 소름이 돋았다. 나이 든 새미의 역할로 버디 가이가 등장한 순간 이 영화는 정말 놀랍게도 버디 가이에게 바치는 헌정 작품이자 또 다른 의미의 버디 가이 전기 영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라이언 쿠글러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극 중 새미의 이야기 (음악과 블루스에 대한 태도 등)를 진지하게 다뤄냈기 때문에 마지막 버디 가이가 등장했을 때 '와, 이러면 이건 전혀 다른 색깔의 전기영화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떤 뮤지션의 삶을 시간 순서에 따라 쭉 훑지 않더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헌사하는 전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언 쿠글러의 전작들을 모두 좋아하긴 했지만 '씨너스' 이후 그 기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제 쿠글러와 마이클 B. 조던 그리고 음악감독 루드비히 고란손 콤비가 또 함께하는 작품은 내 1순위 기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