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드라마가 말하는 시대적 화두
SBS<뿌리깊은나무>(2011년)의 핵심은 과두정(Oligarchy)과 민주정(Democracy)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치 제도로서 이 두 체제 중 무엇이 더 좋은가를 놓고 대결을 펼친다. 군주지만 아이러니하게 민주적 가치를 지향하는 성군 세종과 백정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지만 엘리트 중심의 과두제를 지지하는 정기준이 드라마의 대마를 형성한다.
군주정(Autocracy)의 가장 큰 장점은 전권을 쥔 리더가 있고 그 리더가 세습되기 때문에 국정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권력이 나뉘어 있으면 패권을 두고 다툴 수밖에 없다. 상대를 믿지 못 하기 때문에 내 안위를 위해 남을 공격해야 하는 관계는 그 자체로 불안정하다. 군주정 지지자는 설령 악한 군주 밑에 있는 게 정글에 내던져지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군주가 자기 파멸적으로 제 백성을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오너십이 좋다는 이유도 그와 같다. 자기 회사 말아먹기 위해 작정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반면 실제 군주정은 무능하고 악해 곧잘 무너져왔다. 많은 군주가 제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 해 일을 그르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그 말을 따르면 왕은 무엇이든 다 된다 생각한다. 부장님들의 개그 감각이 떨어지는 이유가 그와 같다. 견제가 없으면 무뎌지고 무능해지기 쉽다.
정도전은 고려라는 왕조를 무너뜨리면서 명목 상 왕이 지배하지만 통치는 사대부가 하는 나라를 꿈꿨다. 왕은 매번 뛰어날 수 없지만 대신들은 뛰어난 사람들 중에 고를 수 있고 그러면 통치가 더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뛰어난 사람을 과거를 통해 뽑는다는 점에서 혈연에 기반을 둔 고려의 과두제적 성격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양반이 다스리는 과두정은 군주정보다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양반은 백성을 위하게 될까? 백성이 권한이 없어도 그들을 위해 정치를 할 수 있는가? 지금도 선거 때만 국민을 위하는 위정자들을 목도하고 있는 마당에 그럴 것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백성 스스로가 올바르게 판단하고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민주정은 권한이 구성원 개인에게 부여되어야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있다. 하지만 민주정은 가장 불안정하다. 어찌 보면 정글과도 다를 게 없다.
정도전의 후예 정기준은 과두정의 화신이다. 그는 이방원의 철권통치를 비판하고 전복할 기회를 노린다. 어린 시절부터 군주정의 잔악한 실상을 목격한 세종 역시 군주정이 가진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양반이 지배하는 과두제를 넘어 백성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민주정을 꿈꾼다. 군주가 민주정을 꿈꾸는 것은 아이러니다. 아무리 성군이었다고 해도 세종이 민주정을 조선의 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기준은 그런 세종에게 ‘이도(李祹), 너는 무책임하고 게으르다.’고 비판한다. 과두정의 리더는 자기를 연마하여 백성을 지키는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엘리트로서, 또 선택된 자로서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과두정의 미덕을 부정하는 일이다. 정기준 입장에서 백성에게 판단할 기회를 준다는 말은 가장 현명한 자가 해야 할 일을 백성에게 떠넘기는 일로 읽힌다. 세종은 이 말을 듣고 고민한다. 결국 좋은 군주가 되면 될 것을, 좋은 리더가 있으면 될 것을... 왜 백성이 스스로 판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백성은 얼마나 바쁜가? 도대체 사안을 제대로 이해할 분별을 갖출 수는 있는 것이며 그럴 전문성을 마련할 여건은 되는가? 아직 백성이 스스로 준비되지 못 한 마당에 세종은 그것에 대답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이 스스로 배울 기회를 주고자 결정한 것은 결국 백성에게 기회를 주어야만 더 좋은 세상이 언젠가는 온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행보는 그래서 여느 군주처럼 일사분란하지 않다. 세종은 백성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백성이 그 뜻을 진정으로 따라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백성의 분노와 백성의 한(恨) 또는 가능성을 두 인물에 상징화한다. 백성의 분노는 똘복이(장혁)에게, 백성의 한과 가능성은 소이(신세경)에게 투사된다.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상에서 먼 미래에나 가능할지 모르는 세상을 꿈꾸는 건 똘복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말을 하는 위정자들은 사기꾼이다. 현실에 천착하고 제 식구의 목숨을 우선하는 사람을 세종은 끝까지 설득하고자 노력한다. 글을 몰라 참변을 당해 말을 못 하는 소이는 백성의 한 맺힘이다. 그런 백성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백성의 잠재력이기도 하다. 백성은 한이 많아서 가진 능력을 극대화한다.
세종은 이들과 함께 가려 했고 그래서 세종은 가장 쉬운 글을 만들려 한다. 가장 백성에게 필요한 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편에서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지만 소이와 똘복이를 잃는다. 그들이 죽은 세상은 무참하고 허무하다. 그럼에도 역사는 진행하고 더 자유로운 세상을 기대하게 된다. 세상은 한 사람의 열망과 소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육룡이나르샤>는 <뿌리깊은나무>의 프리퀄이다. 구조적으로만 보면 이 드라마는 다시 군주정과 과두정의 대결을 그린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워야 하는 이유가 드러나고 정도전이 꿈꾸는 세상이 그려진다. 정도전은 새로운 왕이 되는 것에 주저하는 이성계와, 거사를 함께 도모했지만 과두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야심가 이방원 사이에서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전작이 그랬듯이 드라마는 어느 한 쪽 진영을 선으로 놓고 악을 무너뜨리는 구조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항상 각 진영의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그 안에서 답이 서서히 떠오르게 만든다. <뿌리깊은나무>에서 세종과 정기준의 팽팽한 언쟁이 있을 때만 해도 무엇이 더 좋은 길인지 시청자들도 고민에 빠진다. <육룡이나르샤>의 이방원은 선하면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확신에 차있고 승리를 위해 주저함이 없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 안변책이 담긴 문서에 인장을 찍고 장인을 겁박하기도 한다. 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긴 다음 제대로 하면 된다. 어찌 보면 <육룡이나르샤>에 나오는 이방원의 모습은 KBS<정도전>에 등장하는 삼봉과 닮아있다. 술수에도 능하고 이기는 정치를 한다.
반면 <육룡이나르샤>의 정도전은 <뿌리깊은나무>의 세종과 더 닮아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道)에 어긋남이 없는지 살핀다. 적들과 손을 잡을 때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이방원이 아버지를 속이고 안변책을 통과시켰을 때도 그는 분노한다. 이성계 장군이 진심으로 뜻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마음도 살핀다. 백성의 분노와 한을 이해하고 그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땅새, 분이는 똘복이, 소이의 동어반복이다. 정도전은 이들을 규합하고 함께 가야만 새 세상도 온전하게 열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도전과 이방원의 갈등은 세종과 정기준의 갈등만큼 선명하지 않다. 선악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다. 홍인방과 손을 잡고 앞장 서 최영을 제거하려는 모습은 앞서 이야기한 정도전의 모습에서 튄다. 목적지향적인 이방원이 백성들과 순박하게 어울리는 모습도 엇박자 같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하는 행동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니 갈등이 흐려진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시선은 ‘어떤 방식의 정치 체제가 가장 합리적인가’라는 질문보다는 ‘각자 난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두고 있는 건 아닐까? 정도전은 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이, 이방원은 자신의 꿈과 모두가 바라는 세상 사이에서의 갈등이 자기 앞에 놓여있다. 그래서인지 <육룡이나르샤>는 유독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홍인방의 변절이 그러했고 길태미가 죽음 앞에서 무엇에 집착했는지 나온다. 이방지는 자신의 여인과 주군인 정도전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동으로 규정된다.
<뿌리깊은나무>가 만들어졌을 때는 민주적 가치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잃어보니 그 의미를 알아갈 때였다. 그리고 <육룡의나르샤>가 방송되던 시점은 더 좋은 세상이 올지 장담할 수 없는 시대다. 그래서 지금 <육룡이나르샤>는 엄혹한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각자에게도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 올 것이라 말한다. 그때를 위해 지금 스스로에 대해 더 물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훨씬 나약하고 비겁하고 욕심 많은 사람들일지 모른다.
최초작성 2015년 12월4일 <네이버블로그> 수정 개시 http://blog.naver.com/shinwankim/220557572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