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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Jul 28. 2016

사랑하라, 동물을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하여

   골목을 걷고 있었다. 보슬비가 오기 시작했다. 해는 다 졌는데 여름 한낮의 열기는 아직도 동네를 덮었다. 우산을 펼쳐 들고 여자친구와 길을 걸었다. 세 걸음쯤이었을까, 자동차 아래 웅크리고 있는 새하얀 솜덩이와 맑은 두 눈을 우리는 동시에 발견했다. 새끼 고양이였다. 자세히 보니 바퀴 바로 옆에는 또 다른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흰 바탕에 노랗고 검은 얼룩이 큼직하게 몇 군데 박힌 새끼 고양이였다. 잠깐 동안 구경하다 정적을 깬 건 여자친구였다.


“근처 편의점에 들러서 고양이 먹이라도 사서 주자.”


   길고양이에게 음식을? 나는 동물을 마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키워본 동물이라고는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께서 기르시던 금붕어 대여섯 마리, 큼지막한 토끼 한 마리뿐이었다. 나와 함께 한 동물들은 나쁜 결말을 피한 적이 없다. 금붕어는 먹이를 너무 많이 줘서 배가 터져 죽어버렸고, 토끼는 우리를 잠시 열어둔 사이 집을 나가 버렸다. 아마도 굶어 죽거나 고양이 밥이 됐겠지. 참, 중학생 때 아버지께서 대뜸 데려오신 강아지 두 마리가 있었다. 한 달인가 키우다 지쳐서 분양 보냈다. 먹는 양과 싸는 양이 어마어마해서 먹이고 치우는 일이 고역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동물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단지 나와 함께 하는 동물들이 맞닥뜨릴 결말이 그려지는 것뿐이다, 피하고 싶은 결말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걸까,
네가 주는 좋은 느낌을 사랑하는 걸까?


   그런데 그 눈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가지 않으면 죄라도 되는 듯이, 새하얀 솜덩이는 애처로운 도도함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리를 피했을까? 먹이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 와중에도 여자친구는 캔 뚜껑에 여린 입을 다칠까 먹이를 담을 종이컵도 따로 구했다. 은신처에 다시 돌아오니 감사하게도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종이컵에 먹이를 담고 우리의 호기심과 그들의 경계심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을 만한 곳까지 먹이를 밀어두었다. 몸을 숙여 자세히 보니 새끼 한 마리가 더 있었다. 뜻밖에 새하얀 어미 고양이도 우리 뒤편에 서 있는 파란 트럭 아래에서 꼬리를 세우며 다가왔다.

   고양이 가족에도 장유유서는 있는지 어미가 먼저 먹고 나서야 새끼들도 먹이에 입을 댔다. 고양이 가족은 맛있게 먹고 우리는 그들을 재밌게 봤다. 한참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쳐있었다. 고양이 가족은 밥을 다 먹었다. 어미는 한 팔을 베고 누워 졸음에 겨웠다. 새끼 두 마리는 어미 뒤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새하얀 솜덩이 한 마리만 차에서 나와 혼자 놀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친구 집에 놀러 가서 그 집 고양이와 논 적이 있었다. 움직이는 것들에 흥미를 느낀다는 속설이 떠올라 갖고 있던 우산을 들이밀었다. 좌우로 몇 번 흔드니 어미고 새끼고 할 것 없이 우산 따라 고개가 돌아간다. 가끔씩은 화려한 ‘냥냥펀치’를 선보이기도 했다. 신기하고 재밌고 행복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부산행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차창에 예쁜 꽃이 보 목적지도 잊어버리고 덜컥 내린 느낌이었다. 예정에 없던 행복을 즐긴 뒤에 여자친구와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하얀 솜덩이가 뇌리에 꽂혀 더 이상 뽑히지 않았다. 눈은 무슨 색일까? 발바닥은 얼마나 연할까? 털은 얼마나 보드라울까? 어미가 예쁘니 자라버려도 나쁘진 않을 거야. 내가 그 여린 생명을 사랑하게 된 걸까? 솜덩아,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걸까, 네가 주는 좋은 느낌을 사랑하는 걸까?





내가 원하지 않을 때에도 동물은 있고,
원하지 않을 때에도 무언가를 느끼도록 만든다.

   어릴 때 키우던 금붕어는 참 조용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상호작용은 먹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가끔은 먹이를 쥐지도 않은 손으로 금붕어들을 불러 모았다. 금붕어를 보고 있으면 너무 외롭고 심심했다. 너희는 나한테 관심도 없지,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만류에도 계속 먹이를 주던 잔인한 어린 마음이었다. 토끼는 나를 곧잘 따랐다. 먹이를 주지 않아도 종종 나와 눈을 맞췄다. 끊임없이 벌름거리는 코와 수염도 귀여웠다. 그런데 흰 털에 빨간 눈을 보고 있으면 뭔가 으스스했다. 당근으로 착각한 내 손가락을 커다란 앞니로 물어버릴 때면 먹이를 주다가 때때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두 손에 들어오던 새끼 때와는 전혀 다른 크기도 문제였다. 어쩌면 우리 밖으로 뛰쳐나가길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중학생 때 만났던 강아지 두 마리는 좀 나았다. 눈맞춤은 물론이고 손짓 언어도 이해했다. 나를 보면 펄쩍 뛰고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드는 건 덤이었다. 생김새도 마음에 들었다. 곱슬곱슬한 갈색 털에 사자같이 굵은 다리는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 발걸음도 멈추게 했으니까. 성격도 활달했다. 항상 웃는 입이었고, 산책이라는 소리라도 들리면 적어도 한 시간쯤 전부터 난리법석이었다. 그러나 나 아닌 생명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존재였다.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 하지 못하는 날이면 강아지가 주는 모든 즐거움이 미안함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식사시간을 깜빡한 날에도, 산책을 나가기 싫었던 날에도 그들은 나를 사랑했다. 힘들었던 건 먹이고 치우는 일이 아니라 먹이지 못하고 치우지 못한 날에 나를 짓누르던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동물을 버리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약간은 이해한다. 나를 이해해주는 그 몸짓이 좋았고, 내가 보기에 듣기에 만지기에 나쁘지 않은 그 몸짓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몸짓이 더 이상 좋지만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원할 때에만 원하는 느낌을 주는 밥이나 옷,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을 때에도 동물은 있고, 원하지 않을 때에도 동물은 무언가를 느끼도록 만든다. 그때 느껴지는 건 미안한 마음, 곧 죄책감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기르던 강아지들을 버리듯이 분양했다. 버리기엔 견딜 수 없이 미안하니까 마지막 예우라도 갖추었다. 분양을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도 유기를 고민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내가 동물을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은,
“나는 동물을 나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된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걸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보고 ‘폴리스를 이루는 동물’이라고 했다. 흔히 알기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하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사회의 기초는 사랑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가족이고, 가족은 사랑으로밖에 묶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뭘까? ‘너를 나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교의 ‘역지사지’가 그렇고 기독교의 ‘황금률’과 ‘은률’이 그렇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너에게 강요하지 않고(은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너에게 권하는(황금률) 일이 곧 처지를 뒤바꿔 생각하는(역지사지) 일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다시 보면, 인간은 ‘너를 나처럼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러니까 내가 동물을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은, "나는 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되고, 결국 “나는 동물을 나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된다.

   동물복지라는 말이 있고 동물권이라는 말이 있다. 둘 모두 지금 동물들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동물복지는 그래도 사람이 동물보다는 낫다고 본다. 반면, 동물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동물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래서 동물복지주의자는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동물들에게 과도한 고통을 주지 않는 ‘동물복지’를 보장하길 바란다. 이에 반해 동물권주의자는, 마치 인권처럼, 동물들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동물권’이라는 권리의 주체가 되길 바란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동물권보다는 동물복지를 채택하고 있다. 동물을 사람처럼 생각할 수 없다는 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회가 아니다.




세상에 가볍게 볼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동물권이 동물복지보다 낫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육식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이상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해 다른 생명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살아나가야 한다. 더불어 나 스스로 생명유지에 식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세상에 가볍게 볼 수 있는 생명은 없다는 사실 역시 변함이 없다. 내가 동물들로부터 쾌락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도 된다는 생각을 뒷받침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죽음이 우리 생명에 필수적이라면, 최소한 우리가 죽고 싶지 않은 형태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더 바랄 수 있다면, 우리가 죽고 싶은 형태로 죽게 해야 한다. 내가 죽고 싶은 형태는 자다가 나도 모르게 죽는 것,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호상’이다.

   육식보다 더 문제 삼고 싶은 건 동물차별이다. 어떤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을 정하는 문제는 정말 어렵다. 우리나라 복지정책에서 가장 뜨거운 문제는 수혜대상을 어느 기준으로 구분하느냐다. 동물차별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동물차별이 맞닥뜨리는 난제는 중요하게 대접해야 하는 동물과 가벼이 여겨도 되는 동물의 기준이 무엇이냐다. 사람도 착상을 시작한 후 어머니와 분리되는 기간 동안은 동물과 구분하기에 너무나도 어려운 상태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대접해야 하는 동물이야’라고 자칫 성급하게 구분해버리면, 억울하게 동물로 구분될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 큰 문제는 구분이 폭력의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개가 새끼 길고양이를 물어 죽이는 장면을 그대로 생중계한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그 사람의 핵심적인 문제는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가 아니다. 자기 개는 끔찍이도 아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개와 길고양이는 계급부터가 다르다’고 하는 태도가 문제다. 그런 생각이 길고양이를 물어 죽이는 개의 폭력을 정당화한 것이다.

   동물차별은 인간차별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다. 아직도 계속되는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흑인과 백인으로 구분하는 그 자체에 원인이 있다. 동물을 차별하는 태도는 부메랑처럼 그대로 날아와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특히 사람은 시각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주로 시각적 외형에 따라 동물을 구분하려 든다. 시각적 외형에 따라 사람도 구분하는 세상을 외모지상주의라부른다.


동물들에게 살기 좋은 세상은
나에게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되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내가 금붕어를 보고 느꼈던 감정과 토끼를 보고 느꼈던 감정은 대표적인 동물차별이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붕어가 싫어졌다. 싫어졌다는 건 가벼이 여긴다는 걸 의미한다. 금붕어가 싫어진 순간, 멍청한 금붕어와 짜증 나는 모기는 동일한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토끼도 마찬가지다. 외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토끼도 싫어졌다. 토끼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했다. 싫어하는 마음은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변질되어서, 금붕어를 죽게 만들거나 토끼가 위험에 노출되도록 만들었다. 결국은 내 책임이다. 금붕어와 토끼를 사랑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보고 느꼈던 감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생명에 대한 의무를 완벽하게 이행하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강아지를 싫어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가엾은 강아지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싫어하지는 않았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걸까? 글쎄, 내가 보기에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았다. 새하얗고 보송보송한 새끼 고양이를 길에서 만나고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잊고 있었던 이기적인 마음들이 떠올랐다. 아직 나는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적어도 나는 내가 길렀던 동물들을 보면서 ‘너를 나처럼’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다. 동물차별을 서슴없이 했던 내 모습을 보면서, 동물차별은 인간차별과도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동물들에게 살기 좋은 세상은 나에게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되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노력해보려 한다, '너를 나처럼' 동물을 사랑하기로.



*이 글은 브런치 x OhBoy! 공모에 당선되어 OhBoy! 71호 (2016년 10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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