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개꽃 Jun 04. 2020

그냥 함께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첫 번째 이야기 :  달이 이야기

쩌다 시골에 들어와 살게 된 지 햇수로 4년째. 목가적인 삶을 꿈꾸었건만 현실은 동화처럼 안락하지 않았다. 다이어트로도 안 빠지던 살이 빠지고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모임은커녕 친구조차 만나기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전원생활한다며 부러운 눈빛을 보내지만 그때마다 단호하게 얘기한다. 전원생활이 아니라 그냥 시골생활이라고.


이 시골에서 무엇보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마음을 두었던 건 강아지와 고양이인데, 계획에 없던 인연들을 만나면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죽음'과 '불안'을 수십 배는 더 겪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여길 벗어나지 못하고 견뎌내는 걸 보면 나도 보통은 아닌가 보다.


더 잊히기 전에 내가 만나고 헤어진 아이들, 지금 내 옆에서 함께하는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을 기록해두고 싶다. 어떤 색을 띠던 그건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살아낸 날들이기 때문이다.  

   

세월의 풍파를 느끼게 하는 녹슨 쟁반과 쟁반 구멍 사이로 갓 피어난 민들레가 나에겐 서로를 보듬는 오래된 친구처럼 보인다.



달이의 선물


마당에서 사는 달이는 재작년 봄에 태어난 고양이야.

달이를 낳은 어미의 이름은 나비라 지어줬어.

나비는 넷을 낳았는데, 은하수, 별, 달, 그리고 우주야.

달이는 그중에 세 번째로 작고 약했지.

몸은 까맣고 코와 목덜미, 발바닥만 하얀 달이는 제일 약하게 태어난 우주랑 가장 친했어.     


우주는 그나마 어미젖을 먹으며 기운을 냈지만 달이는 애매한 중간 위치에서 어미에게도 못 가고 건강한 고양이처럼 스스로 사료를 먹지 못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을 잘 따랐어. 덕분에 무릎 위에 앉혀놓고 물에 불린 사료를 먹일 수 있었지. 손바닥보다 작은 녀석은 있는 힘을 다해 씹고 삼키고 핥아가면서 그렇게 자양분을 얻으며 살아내기 시작했어. 난 마치 달이의 엄마가 된 기분이었지. 고개를 들고, 작고 까만 눈으로 먹이를 줄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은 내게 자신의 모든 걸 거는 듯한 간절함이었고, 난 기꺼이 받아들였지.      


달이는 방 안에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뒤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갔어.

형제들과 함께. 어미와 함께.

산을 오르락내리락하고, 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낯선 고양이를 만나 몸을 활처럼 구부리거나 학학거리며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배우고, 나무를 오르며 새를 놀라게 하기도 했어. 햇빛 쏟아지는 마당에서 늘어져라 잠도 자고, 사계절을 온몸으로 맞으며 뛰고 멈추고 달리고 놀았어. 그러다 “달아~.” 부르면 어디선가 나타나 달려오곤 했지


잔디밭에서 쉬는 달이. 구청에서 해준 무료 중성화 수술 때 귀가 반토막이 되었다. 동물학대라고 구청과 정부에 항의했지만 잘린 귀를 되돌리진 못했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잘 지낼 줄 알았어. 그렇게 어미와 새끼들이 오래오래 내 집 마당에서 행복하게 살 줄 알았어.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중성화 수술을 시킨 후 다시 건강을 회복했고, 무럭무럭 자라났고 늘 그 자리에 그 고양이 가족이 있었으니까. 난 아낌없이 좋은 사료를 준비해주었고, 철마다 쉴 곳을 마련했고, 마당은 그 아이들이 놀고 쉬기에 충분히 넓었으니까. 달이는 조심성이 강해서 아주 먼데로 놀러 가거나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온갖 경험을 통해 위험을 감지해 피할 만큼 영리하게 자랐다고 생각했으니까. 자기들끼리 볼을 비비며 놀고 쉬고 먹고 자며 모여 있었으니까. 고양이 평균 수명이 18-20년이라니까 로드킬 당할 위험만 없다면 오랜 시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너무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어. 물론 달이가 크고 몸이 자랄수록 나와의 유대관계보다는 자신들만의 세계로 더 들어가는 듯해서 섭섭하긴 했지만 괜찮았어.



달이가 스스로 밥을 먹지 않은지 나흘째. 자동차 아래 들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 도망갈 힘도 없는 녀석이 축 늘어진 채 내 팔에 안겼어. 그렇게 좋아하던 캔을 코 앞에 내밀어도 그저 우울한 듯 코를 팔꿈치에 콕 박고 있기만 해. 난 이런 경우를 많이 겪었어. 고양이가 먹지 않게 되는 순간 다시 전처럼 건강하게 되돌아가는 건 매우 희박하다는 걸.

“고양이는 사흘 정도만 물을 안 먹어도 큰일 납니다.”

수의사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어. 그리고 살려보겠다고 이런저런 방법을 썼지만 결국 하늘로 보내줘야 했던 기억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지. 다시 한번 삶의 평화는 깨지고 같은 경험의 기억이 우르르 밀려와 희망의 빛을 몰아내버렸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불안은 그렇게 시작해서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하느님은 계신 건가, 작년에 우주와 별이를 데려가고 나비마저 자취를 감췄으면 이제 불행의 얼굴을 내게서 돌려줘야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시작된 분노는 결국 모든 책임을 신께 돌리며 살려내라고 울부짖었어.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살려내라고. 사랑하는 귀여운 생명들이 사라지는 걸 다시 보고 싶지 않았어. 다시는...    




    

이번엔 기적을 바라지 않았어. 그동안 너무 많이 희망고문 같은 기적에 기대다 가슴에 공허한 구멍만 뻥뻥 뚫려버렸거든. 그래서 치료 같은 건 안 하기로 했어. 그저 살아있는 동안 더 사랑해주고 싶었어.

달이 곁에 더 있어주고, 달이가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귀와 볼을 쓰다듬어주기로 했지.

가끔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쩝쩝하는 순간이면 손가락에 물을 묻혀 이빨에 발라주었어.

치료용으로 먹는 캔을 따서 손가락에 묻혀 입 속에 넣어주면 거부하긴 하지만 입 속에 들어간 건 어떻게 해서든 잘잘 씹어 삼키길래 그렇게라도 빈 속을 메꿔주려고 했어.

그러다 스스로 할짝거리며 조금이라도 먹게 되면 하늘을 날 듯 기뻤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의 기도를 주문처럼 외면서 말이야.     

난 다시 무거운 삶의 주제 앞에 서 있게 되었다고 느꼈어.


삶과 죽음 사이,

오늘과 내일 사이,

빛과 어둠의 사이,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사이에 낀 불분명한 지점’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은 알 거야.

그 시간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지. 희망을 품어야 하는 건지, 순종하는 미덕을 배워야 하는 건지 결정하지 못한 채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두려움 속에 무력해지는 기분.

수많은 경험으로 깨달은 건 그저 생명력은 결국 스스로 딛고 일어설 때 가능하다는 걸 아니까,

달이가 스스로 먹지 않는 한 아무리 매일매일 내가 주는 밥을 먹는다 해도 결국 끝이 보인다는 걸 아니까.

난 그저 병과 고군분투하는 달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어둑한 하늘에서 쏟아붓는 빗줄기,

휘청거리는 느티나무,

찢어질 듯 펄럭이는 깃발,

닫힌 창문을 깨고 들어올 것만 같은 으스스한 바람, 날은 또 왜 이리 심란한 지..





닷새 되는 날 아침. 달이는 평소 잠을 자던 높은 선반 위에 누워있었어.

몸이 아프면서는 뛰어오르질 못해서 늘 구석진 자리나 자동차 밑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늘어지게 잠을 자던 높은 선반 위에 있는 거야...

아, 왠지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어.

달아~ 부르니까 고개만 조금 들고 나를 쳐다보는데, 졸린데 간신히 눈을 뜨려고 애쓰는 것처럼 힘들어 보였어. 잘 잤어? 하며 인사를 건넸지.

그리고 스스로 선반 위에서 내려오길 기다리며 주변을 어슬렁거렸어.

 


드디어 달이가 몸을 일으켰어. 그리고 땅으로 내려왔지.

그리고 늘 사료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어.

그릇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어.

제발..제발...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고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을 만큼 정적에 놓여 있었지.

달이가 먹기 시작했어.

하나 둘 셋...사료를 아작아작 씹고 있는 거야.

정말 먹고 있는 거 맞지? 나에게 물었어.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다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이 될 거라는 알 수 있었지.

내 숨이 건강하게 쉬고 있는 걸 느꼈어.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     



달이는 밥을 먹자 날쌔게 뒷산으로 뛰어갔어. 내게 와 비비지 않아도 그걸로 달이가 내게 보여준 사랑은 충분했어.  


모두 떠나고 남은 나비, 달이, 은하수. 그런데 나비조차 자취를 감춘 지 두 달이 되었다.


에필로그...

아침마다 눈을 떴을 때 마당에 나가는 게 두려웠다. 깨어나지 못한 달이를 보게 되는 게 두려워서였다. 난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고, 기적을 바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책임감을 놓아버리자 조금은 달이 곁에 있는 게 두렵지 않고 편안해졌다. 사랑은 책임감으로 하는 것도, 책임감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존재끼리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견디는 행위인 것이다. 



소통하고 싶은 책 소개

 

[행복해 행복해 정말 행복해]-대니 파커 글, 프레야 블랙우드 그림, 권준성 옮김/키즈돔

아이들이 보내는 평범한 하루의 모습을 고양이와 함께 그려냈다. 평범한 일상의 그림이 이토록 안정감을 주고 행복한 것인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시간을 겪고 나면 알게 된다.

앞치마 두르고 요리할 수 있어서, 망가진 걸 고칠 수 있어서
...
 따뜻한 담요와 기댈 곳이 있어서,
누군가를 안고 있을 자리가 있어서,
기다려지는 내일이 있어서 행복해 행복해 정말 행복해



[아기 고양이]-이시이 모모코 글, 요코우치 조 그림, 김숙 옮김/북뱅크

아기 고양이가 호기심에 밖에 나섰다가 자동차와 개를 만나 위험에 놓이지만 아기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 고양이가 무사히 데리고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하루가 고단했을 아기 고양이가 편안하게 어미 고양이 젖을 먹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행복해진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일인가.

작은 고양이는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 "야옹! 야아옹!" 하고 울었어.
개는 나무 아래에서 으르렁거리고 있고
....
엄마 고양이가 아기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어.
엄마 고양이가 달리기 시작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