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기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 자체가 이루어낸 결과이다. 상호 협력자인 동시에 경쟁자인 인간은 그래서 서로 다른 이유로 인간이 필요하다. 까마득한 인류의 초창기 시절, 같은 종족이어도 서로가 낯섦을 느끼니 전부 적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다른 인간 종들을 만났을 때는 낯섦의 정도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를 적으로 돌려야 하는 미칠듯한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DNA에 박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기 때문에 ‘너’라는 의미는 중요하다. ‘나’에서 ‘너’가 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강을 하나 건너야 한다. 앞서 표현한 미칠듯한 불안감을 극복해 내지 못하면 ‘너’라는 단어는 내 안에 존재할 수 없다. 내 앞에 놓인 존재는 단지 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적을 없애지 않으면 당장 나의 생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이기적일지라도 극복해 내어 ‘나와 너’라는 관계를 만들어 내었다.
그때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한 번도 이 세계에서 주도권을 내어 주지 않았다. 유려한 협력은 서로 간의 경쟁도 잊을 만큼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내었다. 여전히 거대한 자연 앞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 자연도 곧 극복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인간의 협력이 갖는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도의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생명도 연장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도 들게 하는 오늘날 현재의 모습에도 인간이 넘지는 못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인간은 여전히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날마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간은 조금씩 멀어질 수조차 없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 한 걸음 더 죽음에 가까워진다.
죽음뿐만 아니라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 불안 역시 인간이 극복해 내지 못했다. 여전히 인간의 본성은 협력 너머에 있는 경쟁에 있다. 교육을 통해 본성을 어느 정도 억누르며 살았기에 이렇게 사회를 가꾸며 살고 있지만, 본성이라는 것은 잘 훈련된 동물들에게서도 사고가 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위험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온통 불안으로 가득하다. 그 불안은 위험하며, 상대방에게서 오는 낯섦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너’의 의미가 생긴다. 불안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를 보고 있으면 ‘나’의 불안이 커진다. 그동안 이루어 놓은 협력이라는 결과를 다 버리고, 불안하게 하는 존재를 처단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내 앞에 ‘너’는 결국 ‘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칠듯한 불안감이 생기지만 그것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이 어려운 상황은 관계를 발전시키고 나를 성장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불안감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심지어 ‘너’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 다 다르기 때문에 불안도 다양하게 다가온다. 다양한 인간만큼이나 불안도 다양하니, 내가 가지고 있는 모습도 ‘너’를 통해 비교해 볼 수 있다. 비교는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패를 숨길 수 있게 돕기도 하고, 다른 멋진 것으로 바꿔볼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이다. 그래서 ‘너’는 늘 ‘나’의 거울이 된다.
오늘도 불안한 존재들을 많이 만났다. ‘너’의 불안을 통해서 ‘나’는 한 뼘 더 성장하였다. 나의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마주하다 보면 많은 불안들을 구분할 수 있겠지. 그리고 ‘너’가 처한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도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
이 미칠듯한 불안감은 오늘도 내 주위를 감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