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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leex Jan 07. 2022

퇴직금을 털어, 천만원짜리 자전거를 샀다

마흔 다섯의 퇴사錄 _ 세 번째 이야기

갑자기 주어진 넉넉한 시간, 누군가에 의해 강제된 일 없는 하릴없는 하루. 그 어색한 일상을 보내노라면 어느 순간 헛헛해지기 마련이다. 왜 이별을 하더라도 막상 당시에는 실감이 안 나다가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갑작스럽게 상실의 감정이 폭풍처럼 밀려오지 않던가? 직장생활도 하나의 관계 맺기라면 퇴사는 그 기간 동안 살을 맞대고 부대끼며 살아오던 누군가와 단박에 헤어진 일과 다를 바 없으리라.


헛헛함이 온감정을 집어삼킨 어느 날 갑자기 사고 싶은 것이 생겼다. 자전거다. 어린 시절부터 자전거에 대한 로망이 컸다.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다 그냥 좋았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가 시원한 강바람을 맞는다던가 하는 기능적, 부차적인 이유 말고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 애착 물건 같은 것이랄까?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딘가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야~XXX"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같은 반 친구 A와 B였다. 그 둘은 똑 닮은 검정색 싸이클을 타고 있었는데 싸이클은 커녕 어린이용 두 바퀴 자전거도 가져보지 못한 나에게 마치 근사한 흑마 두대가 서 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와, 자전거 멋지다."

나도 모르게 탄성과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자전거가 뭐냐, 싸이클이지."

둘은 얼굴을 마주하고 큭큭 웃었다

"넌 자전거 없냐? 있으면 같이 타자."

"아, 난 자전거 안 좋아해.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다음에 보자."


나는 그 둘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유광의 검정색 프레임에 은빛 빗살이 촘촘히 박힌 커다란 바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동안 집의 경매 문제 따위 금전적 어려움이 컸던 때라 자전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씨앗처럼 심겨졌을 뿐, 말 한마디 꺼내볼 형편도 안된다는 사실만은 또렷이 인식했던 것 같다.


내 힘으로 첫 자전거를 산 것은 군대를 다녀온 이후였다. 당시 담배도 피우지 않고 딱히 돈 쓸 일이 없어서(물론 집에서 용돈을 보내주었지만) 월급을 그대로 모았는데 전역 당시 40만원이 넘었다. 전역 후 그 돈으로 자전거를 한대 샀다. 집 근처의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으로 달려가 지금으로 보면 유사 엠티비 NEXT 라는 브랜드의 자전거를 30여만원을 주고 사서 한동안 타고 다녔었다.


그렇게 자전거의 세계에서 빠져 여러 자전거를 거쳤다. 그 시절 친구 녀석들이 싸이클이라 부르던 로드바이크를 처음 중고로 샀을 때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한데, 오래 꿈꾸던 궁극의 보물이라도 손에 넣은 양 한동안 방에 모셔놓고 보고 또 보고 했다. 당시 돈으로 100만원, 얼마 타지 않아 번들번들 윤이 나던 빨간색 로드를 손에 넣고 바라만 봐도 좋은 기분을 며칠 유지했다. 물론 그 감흥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중고거래로 자전거 사고팔기를 반복했다. 말하자면 더 높은 사양으로의 기변 같은 것이었는데 초봄이 되면 약간 사양이 더 좋은 모델을 샀다가 가을이 오면 팔고 비수기인 겨우내 장터를 뒤지는 패턴의 연속이었다. 자전거를 타는 시간보다 검색하고 사고팔고 하는 기간이 더 길었으니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이다. 그 와중에 눈만 높아져서는 수백만원은 우습게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잘 모르는 사람이 듣자면 '자전거에 수백?' 이라며 기겁할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핍으로 생성된 어떤 욕망이 해결되는 과정 그 자체를 즐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퇴직을 하니, 자연히 퇴직금이 들어왔다. 이전 회사에서만 14년을 일했으니 14년 치의 퇴직금이다. 거기에 이런저런 연금이나 저축을 포함하니 꽤나 목돈처럼 보였다. 불확실한 미래를 감안하면 그 정도의 금액이 결코 안전망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나를 위한 선물을 하고 싶어졌다. 직장생활 도합 16년, 열심히 살아온데 대한 스스로의 선물이랄까? 나름의 위로가 필요했다. 헛헛함, 그 상실에 대한 위로. 요즘 인스타에는 고가의 명품을 사고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피드들이 넘쳐나는데 흉내 한 번 내볼까? 싶기도 했다.


슬쩍 운을 띄우니 아내는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당황을 한 것은 내쪽이었다. "괜찮겠어? 자전거 우습게 보면 안 돼." "마음대로 하시라구요."

하긴, 한창 돈 들어가야 하는 나이에 퇴사하겠다는 생각에도 한 번의 고민도 없이 힘을 실어주지 않았던가? 막상 큰돈을 들여 최상급 자전거를 사려니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 지금 이 상황에 이게 맞는 건가 싶어 머뭇거렸다.


그래도 이왕 결정한 것, 큰마음먹고 자전거 대리점으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가성비 모델부터 눈에 들어왔겠지만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기함급 자전거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모델을 발견하고 가격표를 봤다.


870만원.


헉. 870만원. 자전거 한대에 870만원. 이미 자전거 가격에 내성이 생긴 나였지만 중고가 아닌 신품을 큰돈 들여 사려니 망설여졌다.


"좋은 모델입니다. 이거 딱 두대 남았는데 마침 고객님 사이즈에 딱 맞네요."

"아, 예 그러네요. 딱 제가 찾는 사이즈에 멋지긴 하네요."

"보세요. 기함급 프레임에, S사 무선 전동 12단 구동계에 디스크 브레이크, 카본 휠셋까지 완전 기함은 아니지만 준 기함급이니까 한동안은 기변 없이도 만족하실 겁니다. 여기에서 할인도 조금 해드릴게요."


브랜드는 자전거 동호인 사이에서 한동안 "비싸서 못사 X발" 이라는 우스개로 알려진 고급 브랜드다. 그간의 경험상 자전거 본체는 870이지만 헬멧이나 져지 따위 각종 장비들을 맞추려면 총액 1000만원은 넘을 것이다. 손이 떨렸다.


"고민 좀 해볼게요."


그 고민은 며칠간 이어졌다. 


'그거 없어도 살잖아? 아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꼭 그래야겠어?'

'인생 살면 얼마나 산다고. 지금 안 하면 언제 또 할 거야? 내일은 내일일이야 지금을 생각하라고. 너한테는 무엇보다 위로가 필요하잖아. 지르라구!'

마음속 천사와 악마가 번갈아 가며 속삭였다. 그 와중에 마음을 먹고 대리점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 먹고  되돌아 나오길 서너 차례. 마침내 결정을 했다. 처음 방문을 하고 3일 만이었다.


"그 모델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박스를 까고 조립이 시작됐다. 아, 이미 엎질러진 물. 불편한 마음과는 다르게 점점 형태를 갖춰가는 내 첫 신품 기함 로드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900에 가까운 자전거를 일시불로 긁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불확실한 미래니 이래도 되니 싶었던 마음들은 온 데 간데 없어지고 묵직한 성취감이 차올랐다. '물질적 만족은 저급한 것이다' 라고 평소 외쳐왔던 나였지만,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고 싶은 욕망에 따르는 별 수 없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헛헛함은 당분간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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