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가지는 역학관계에 대한 해명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
위 명제를 진술하기 위해선 일단 삶과 죽음의 인식적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살지 않은 상태가 죽음이고 죽지 않은 상태가 삶이며 또한 살고 싶다면 죽을 필요가 없고 살고 싶지 않다면 죽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상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며,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살고 싶어”와 “죽고 싶지 않아”가 같은 의미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 글에선 삶과 죽음의 추구에 대해 인지적 측면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위 명제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해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의 평상시인 ‘삶’이 아니라 우리가 피상으로만 이해하는 ‘죽음’의 경우를 고려하기 위해 명제의 조건을 반대로 바꾸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살고 싶어”와 “죽고 싶지 않아”는 “살고 싶지 않아”와 “죽고 싶어”가 된다. 그리고 그 소망을 실현해서 살지 않고 죽게 되면 그것은 곧바로 자살이 된다. 그래서 자살이라는 행위의 의의를 한번 살펴볼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살을 하는 이유는 삶이나 세상이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 되더라도 자살을 하는 이유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자살이라는 결과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인과를 구성하지는 못 하는데, 왜냐하면 삶이나 세상이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만 존재할 뿐이며 그러한 상황을 인지한 상태에서 내가 나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거나 극복하려는 건 어떤 방식으로나 내 주관의 영역에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으로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하면 자살이라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 함에도 불구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이유와 자살이라는 결과는 동치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자살은 현재의 상황에 굴복하고도 불복하기 위해 저지르는 최후의 발악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무시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굳이 발악하는 것은 삶과 세상을 탈피해서라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한 결과다. 결국 죽고 싶다는 것은 도리어 살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기대와는 달리 삶에 대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 부조리 속에서 ‘삶에의 의지’는 죽음에 대한 욕망으로 변형되어 왜곡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의 의지를 인정하는 것은 굳이 인생의 특정한 의미를 인정하거나 부여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원동력으로써의 삶을 긍정하는 동기가 되는데, 왜냐하면 죽고 싶다는 감정마저도 결국 살고 싶다는 정반대에 위치한 의지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사고를 비롯한 모든 측면의 기저에 삶에의 의지가 실재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앞서 명제의 조건을 뒤집어보며 죽음에 대한 고찰의 과정을 거쳤으니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의지의 측면에서 “살고 싶어”와 “죽고 싶지 않아”의 의미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우선 앞에 있는 “살고 싶어”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쉽게 생각해 보면 살고 싶다는 것은 앞서 말한 삶에의 의지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삶에의 의지가 살고 싶다는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선 삶에의 의지가 유발하는 것은 단순히 살고 싶다는 감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욕망 또한 삶에의 의지가 세상과 충돌하여 생긴 왜곡인 것처럼 삶에의 의지는 외부의 사건에 의해 좌절될 때 부정적인 형태의 감정을 발산한다. 그리고 삶에의 의지는 삶이 거부되어 자신이 부정되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며 역동적인 신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광의의 뜻으로 비단 기독교적인 신뿐만이 아니라 삶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다. 예컨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가족을 지키고 부양하기 위해서라면 가족은 나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물론 이는 삶과 세상의 무의미함을 자각한 상태에선 일련의 허상에 불과하다.
삶에의 의지가 삶의 동기가 된다면 이는 삶에의 의지 그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라는 개념의 인지에 의한 것이며, 그렇기에 삶에의 의지의 표상은 인간의 사고를 구성하는 하나의 본능인 것이지 살고 싶다는 감정 그 자체를 대변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삶의 가치 자체를 긍정하는 “살고 싶어”는 순수한 삶에의 의지의 실존만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가 세상에 대응하며 형성한 맹목적인 왜곡과 인지적인 착각까지 긍정하는 것이 되며, 그렇기에 살고 싶다는 것은 실존 그 자체에 대한 긍정 이상으로 초과하는 삶을 기대하게 만들고 삶의 의미나 가치를 ‘신’격화하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외부의 사건에 의해 불안정한 부정의 감정이 개입할 때 단숨에 붕괴되어 버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반면 “죽고 싶지 않아”는 삶에의 의지의 원초적 표현으로 앞에서 말한 “살고 싶어”의 외부 충격으로 야기될 수 있는 불안정성과는 대조된다.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은 삶에의 의지가 세상에 대응하며 형성한 맹목적인 왜곡과 인지적인 착각까지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의 의지의 기초인 살고 싶다는 본성만을 순수하게 반영한다. “살고 싶어”가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는 반면 “죽고 싶지 않아”는 부정에 가까운 인상을 주기 때문에 어감적으로는 긍정의 심리에서 전자를 선호하게 된다. 하지만 ‘삶’과 ‘긍정’은 그만큼 본질적인 측면에서 중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죽음’과 ‘부정’의 주변부로부터 중심부의 위치를 위협받으며 여러 예측 불가능한 흐름 속에서 불안정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고, 그렇다면 그 불안정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심부에서 중심부를 마냥 긍정하기보단 주변부를 고려하고 거기서 중심부를 관찰하며 그 의미를 비판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굳이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형태의 작업은 마찬가지로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